참 믿음의 테스트 |약 1:22; 시 119:112

야고보서 1:22 (NKRV)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I. 참된 믿음 vs 거짓 믿음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 혹은 ‘진짜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그 말은 ‘거짓 믿음’ 혹은 ‘가짜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구분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졌다는 믿음이 과연 참된 믿음인지 아니면 거짓 믿음인지 시험하고 참된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스스로 신자라 믿고 살았는데 만일 마지막에 그런 확신이 속임이나 거짓으로 드러난다며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낭패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도 친히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고 부르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으로 이적도 행하였으나 구속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21–23 (NKRV)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면서 이런 자들을 가리켜 ‘믿음에 대해 착각한 불쌍한 자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라고 이들을 부르십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불법은 lawlessness입니다. 성경에서 lawless를 ‘법이 없는 것처럼 사는’ ‘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법을 무시하며 사는’ 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여기서 법은 물론 하나님의 율법, 성경의 명령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천사들을 보내어 이런 자들, 즉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가려내어 풀무불에 던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3:41 (NKRV)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디모데후서 3:5도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5 (NKRV) —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도서 1:16 을 보면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적시합니다.

디도서 1:16 (NKRV)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앞의 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예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주라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산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에 반해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13:41의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대비되는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거라고 하니다,

마태복음 13:41–43 (NKRV)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얼마나 대비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시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은 의인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 “자기 아버지 나라”라고 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직분자들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와 같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였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독실하고 종교적인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를 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주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로 산 사람들입니다. 신자라고 불리었고 교회에도 잘 나갔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많은 놀라운 일들이 그들을 통해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칭송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예수의 물과 피로 거듭나고 깨끗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배우고 순종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회개의 방편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한 번 목욕한 자는 날마다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들의 삶의 여정은 말씀을 따라 난 길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이 시대라고 다를 것은 없습니다. 직분자건 아니건 교회안에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동일한 속임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22절에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날에 낭패를 당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상태와 삶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진짜 상태가 어떤지 깨닫고 돌이키지 않으면 이런 자들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II.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에 대한 테스트

그렇다면 이런 비참한 속임, 절망적이고 위험한 속임에 빠져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물론 성경은 참 신앙을 판단할 수 있는 많은 증거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개인의 삶과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죄인의 구원, 그리고 신자의 성화를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한 방편이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신자를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이끄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주제요 형상이요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2:2의 명령을 따라 신자가 세상을 본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되는 도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꼭 곱씹어보십시오,

베드로전서 1:23–2:2 (NKRV) —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도 자기의 말씀으로 거듭나 자기의 말씀안에 ‘살고’(abide in) 자기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자들이야말로 신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종으로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다름아닌 베드로의 주께서 직접 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8:31 (NKRV) —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정 반대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8:43–45 (NKRV) —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자들의 아비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들을 줄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이 이를 밝히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2:34 (NKRV) —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시편기자 역시 악인들이 구원에서 먼 것이 그들은 주의 계명들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편 119:155 (NKRV) — 155 구원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같은 시편 150절은 악인들이 주의 계명에서 멀다고 합니다. 즉 악인들이 구원에서 먼 것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당연히 그들의 삶은 주의 계명과도 멉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추구하지 않는 것과 구원이 먼 것을 동일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율례를 “구하다”고 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과 같이 사용됩니다(신명기 4:29; 역대상 16:11). 또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역대하 14:4; ).

역대하 14:4 (NKRV) — 4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역대하 17:3–4 (NKRV) — 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4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III.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계명, 즉 성경 말씀을 추구하고 그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잘 배우고, 바르게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런 자는 형통합니다.

역대하 26:5 (NKRV) — 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유다의 웃시야 왕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십육세에 왕이 되었고 오십이 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찾는 왕이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했습니까? 연결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한 것입니다(대하 26:5).

형통하게 보이는 자가 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자, 어떻게요, 그의 계명을 가까이하고 배우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그렇게 하는 자들과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찾는가? 나는 구원을 받았는가? 내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가? 구원받은 신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시편 119:112 (NKRV) — 112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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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대한 약속과 응답(야고보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