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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COVID-19)와 관련한 다섯가지 중요한 물음

인류 역사상 지금과 같이 의학기술이 발전을 이루고 의료 시스템이 다수에게 전방위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런 혁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전염병의 위협아래 놓인 적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은 유례없고 비상한 때를 신자인 나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습니까? 성경과 성경의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나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때에 어떻게 발휘되고 있습니까? 나의 생각과 마음은 과연 내가 믿는 성경의 계시를 따라 작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와 같이(마 22:29; 막 12:24, NKRV) 육체와 시대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습니까?

“적실하고 합당한 질문은 사람의 마음을 바른 생각으로 이끕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실하고 합당한 질문은 사람의 마음을 바른 생각으로 이끕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과 같이 의학기술이 발전을 이루고 의료 시스템이 다수에게 전방위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런 혁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전염병의 위협아래 놓인 적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은 유례없고 비상한 때를 신자인 나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습니까? 성경과 성경의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나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때에 어떻게 발휘되고 있습니까? 나의 생각과 마음은 과연 내가 믿는 성경의 계시를 따라 작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와 같이(마태복음, Matt 22:29; 마가복음, Mk 12:24, NKRV) 육체와 시대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습니까?

하나님도 없고 성경도 모르는 세상의 미디어와 사람들의 온갖 소음들이 쉴새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채우려고 하는 이 비상한 시기에 계시된 우리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자문해보아야 할 다섯 가지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물론 가족이나 이웃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자체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작금의 상황에서조차 개개인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악된 일이라고 성경은 천명합니다(로마서, Rom 1:21). 일례로, 적어도 당신은 발전된 의료체계와 기술들이 갖춰진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이 육신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든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직업, 가정, 친구, 가족, 생명 등…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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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생기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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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의 생물학적 기원이나 그 사회적 원인, 혹은 그 책임소재나 음모론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 하시는 모든 일이 의롭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 하나하나를 주장하시고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고 합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뿐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장하시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고 합니다(에베소서, Ephe 1:11). 궁극적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그렇게 뜻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개개의 일들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으며 그것이 다 선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압니다.

3. 작금의 코로나 상황으로부터 얻게 유익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합니다(로마서, Rom 8:28, NKRV). 코로나19(Covid-19)와 같은 소위 ‘재앙’이나 ‘재난’같은 것들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역병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선이란 무엇일까요? 적어도 한 가지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를 통해 사람들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명성, 성취, 재물, 건강, 가족 등…-의 헛됨과 그것을 의지하는 것의 부질없음 깨닫습니다. 이럼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에도 영원한 가치가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가복음, Mk 8:36–37, NKRV). 무엇을 말씀합니까? 재물과 이 세상 재화가 종국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으로 끝나는 삶이라면 그 무엇을 가진들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4. 인생의 짧음과 무덤 너머에 자리한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 인생의 짧음과 죽음이 그리 멀지 않다는, 우리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도록 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털어 지금과 같이 전 지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체를 동시에 동일하게 마주대하게 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Heb 9:27, NKRV). 무덤 바로 너머에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온 인류의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면하고 싶지 않아하는 실체입니다. 하지만 모든 각각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실체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말입니다.

5. 죽음을 넘어서는 길을 아십니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든 아니든 당신은 죽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제 금방 모두가 마주하게 될 실체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노력들이 전에 없이 신속하게 전개되어왔습니다. 이제 금방 백신이 승인될거라는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원하는 효과를 낼지는 두고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 바이러스와 전염병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인류와 개인에 드리운 죄와 그로인한 저주와 심판의 그림자입니다. 세계 처처에 죄가 드리워져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과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의 말씀과 같습니다(로마서, Rom 6:23, NKRV).

성경은 또한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죄에 대한 치료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과 은사를 거스려 죄를 지은 죄인들을 그대로 영원토록 지옥에 던지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각각의 죄인을 정죄하고 그 죄에 따라 벌하시는 것은 지극이 의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의 계시인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John 3:16, N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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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죄값을 다 친히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죄가 용서 받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영원한 정죄와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John 11:25–26, NKRV).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당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라고 지금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렇게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Rom 9:33, NKRV).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지혜롭고 사려깊고 책임있게 우리의 할바를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코로나바이러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렇게 사려깊고 책임있게 행동하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때문이 아닙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이미 죽음까지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 Cor 15:54-57, N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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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신자의 표지 - 경외함(The Fear of God, 벧전 1:17; 히 2:11)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자와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자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어디에 속했다고 합니까?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중직자로 살고 설교자로 목사로 살고 교회를 개척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은 선하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표지는 아닙니다.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재앙가운데 몇 가지를 흉내낸 것과 같이 필요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이 흉내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영혼에 심으시는 영생하기까지 자라가는 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이 경외함 때문에 자신의 언행심사를 삼가할 정도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 앞에서 두려워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까? 이 경외함은 당신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당신의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직장 동료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인정합니까?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합니까? (시편, Ps 2:11)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지나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1 Pet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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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을 경외함

성경에서 ‘경외함’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존중하고 귀히여기는 마음으로 그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사랑에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시편, Ps 119:61; 잠언, Prov 28:14; 예레미야, Jer 33:9).

시편 119:61 (NKRV)

61 악인들이 불의하게 나를 핍박할지라도 나는 주의 법에 떠나이다(사역).

잠언 28:14 (NKRV)

1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예레미아 33:9 (NKRV)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피조물로서, 그것도 타락하고 부패해서 우리 스스로는 하는 것마다 죄로 오염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은 죄로 인한 두려움이기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피조물이 갖는 존재적인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늘의 별도 깨끗하지 못하고 하늘의 천사도 눈을 가리웁니다. (욥, Job 25:5-6; 이사야, Is 8:13).


욥기, Job 25:4–5 NKRV

4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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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Isaiah 8:13 NKRV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속적으로 왜곡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빙자해 하나님의 은혜를 호색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죄인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Heb 12:28-29).

히브리서, Heb 12:28–29 (NKRV)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2. 경외함에 대해 만연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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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지만 신약시대에는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치명적인 오해와 성경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따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세대주의적인 구분은 오늘날 교회에 만연해 있고, 이로 인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폐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이런 생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는 누구라도 성경을 조금만 신경써서 읽으면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과 구약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달라진 것처럼 여기는 것이 이런 생각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요? 신약성경은 정작 이 부분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칭찬하신 사도행전 17장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을 펴서 과연 그런지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약성경의 몇 곳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이해가 얼마나 반 성격적이고 반 복음적인, 우리가 속히 버려야 할 생각인지를 보겠습니다.

3. 거듭난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공통된 표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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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사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으로서의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들의 표본과 모범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그리스도께서 세워가시는 자신의 몸된 교회의 공통되고도 중심적인 표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회심자들;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

a. 회심자들:

회심의 경험과 방식은 회심자들마다 다르지만 그 결과는 한 사람인 것처럼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자’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의 계시된 말씀을 일상에서의 최종적 권위, 절대권위로 받고 삽니다.

b.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

당연히 이런 이해와 확신은 교육되고 학습된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만약 이런 이해와 확신이 교육되고 학습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위 말해서 학식이 많은 것과 구원을 알고 누리는 것이 비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나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구원을 통해 세상의 미련한 것을 들어 세상의 지혜로운 것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것처럼 이 지식은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빛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아닌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식자나 무식자가 아닌 영혼이 이 빛에 비추임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c.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

이런 역사가 영혼에 일어난 결과와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새언약에 속한 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핵심적인 표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입니다. 이는 신약이나 구약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을 경외함’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표지입니다. 복음과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의 표지로서 예외가 없습니다(예레미야, Jer 32:40),

예레미야, Jer 32:40 (NKRV)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 하나님을 경외함, 신약교회의 중심적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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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보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믿고 영원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과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은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표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환영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주의 영이 역사하는 곳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노래하는 찬가의 후렴과 같이 증거됩니다.

사도행전, Act 2:43 (NKRV)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행전, Act 5:5 (NKRV)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사도행전, Act 5:11 (NKRV)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Act 9:31 (NKRV)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Act 19:17 (NKRV)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5.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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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약의 교회가 그 능력과 삶에 있어서 가장 정점에 다다른 모습을 특징짓는 묘사는 다름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그리고 교회사를 통털어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복되고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때마다 예외 없이 동일한 모습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보여왔습니다. 신자 개개인의 삶이 그랬고, 그리스도인 가정의 일상이 그랬고, 교회 공동체의 삶이 그랬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권속으로 양자삼으신 하늘 아버지의 뜻이 분명합니다(베드로전서, 1 Pet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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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 Pet 1:17 (NKRV)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your temporary residence, LEB)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과연 하나님을 경외함은 신자의 일생의 표지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이 하나님의 뜻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가 이 땅을 나그네로 지나가는 내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녀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시편, Ps 2:11 (NKRV)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Ps 119:120 (NKRV)

120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잠언, Prov 28:14 (NKRV)

14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happy)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고린도후서, 2 Cor 7:1 (NKRV)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빌립보서, Phil 2:12 (NKRV)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히브리서, Heb 12:28 (NKRV)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참고, 시편 2:11)또는 감사하자

6. 불신자의 특징,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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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여기에 속한 모든 자들의 삶의 특징이 다름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로마서, Rom 3:18),

로마서, Rom 3:18 (NKRV)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시편, Ps 36:1 (NKRV)

1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향하여 심판을 경고하시며 돌이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복음을 전하십니다(요한계시록, Rev 14:7),

요한계시록, Rev 14:7 (NKRV)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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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공통적으로 말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은 구약시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시대 모두는 물론이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자녀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시편, Ps 130:4; 예레미야, Jer 33:8, 9),

시편, Ps 130:4 (NKRV)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예레미야, Jer 33:8–9 (NKRV)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7.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는가?

보십시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다름아닌 하나님 복음의 은혜에 두려워하며 떠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사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시며 모든 죄를 사하신 것은 주를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경외함을 기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경과 예배, 깨어 존중하며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코람데오의 삶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과 긴밀히 결부됩니다(신명기, Deut 5:29; 8:6).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걸맞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입니다(이사야, Is 8:13). 한마디로, 누가 보든 안보든 하나님이 금하신 과일을 만지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옥불에서 고통받는 것보다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죄와 짝하기를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입니다(로마서, Rom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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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의 공통적으로 갖는 중심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뭐라고 하든, 어떻게 청산유수로 성경을 인용하며 기도하든, 사람들 앞에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든 그의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폭동입니다. 그의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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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자와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자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어디에 속했다고 합니까?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중직자로 살고 설교자로 목사로 살고 교회를 개척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은 선하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표지는 아닙니다.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재앙가운데 몇 가지를 흉내낸 것과 같이 필요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이 흉내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영혼에 심으시는 영생하기까지 자라가는 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이 경외함 때문에 자신의 언행심사를 삼가할 정도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 앞에서 두려워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까? 이 경외함은 당신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당신의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직장 동료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인정합니까?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합니까? (시편, Ps 2:11)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지나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1 Pet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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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삶에서의 칭의와 성화(레 18:2-4, Justification & Sanctification in the Life of Believers)

칭의와 성화에 대한 혼동과 오해와 왜곡은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교회가 자리한 사회에 많은 치명적인 비극과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이로 인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이로 인해 신자라고 일컫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가운데 죄에 종노릇하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구원을 위한 방편이나 도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계명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물론 구약의 가르침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와 의무로 자리할 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공로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순종을 칭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위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 혹은 거룩이요, 이것은 곧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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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구원을 위한 방편이나 도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계명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물론 구약의 가르침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와 의무로 자리할 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공로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순종을 칭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위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 혹은 거룩이요, 이것은 곧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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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구속되어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이제 더이상 자신들이 나온 애굽의 문화와 풍습을 따라 살아서도 안되고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와 풍습을 따라 살면 안되었습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 되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법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레위기, Le 18:2-4).

레위기 18:2–4 (NKRV)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4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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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열방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남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통해 온 열국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실 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그 장막 안에 온 열국을 포함하도록 거룩한 장막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Gen 28:14; 12:3).

창세기 28:14 (NKRV)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첫째 아담이 실패했던 것처럼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이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공고히 섭니다(로마서, Rom 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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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를(히브리서, Heb 3:3)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불러모으셨습니다. 바로의 손아귀에 있던 이스라엘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해 내신 것과 같이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게 종노릇 하던 당신의 택정한 자들을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사 자기 백성 삼으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구별된 친백성으로서 더 이상 음란하고 타락한 이 세상의 풍속과 규례가 아닌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그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백성을 통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 그의 긍휼과 사랑으로 충만케 하고자 함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레위기 18:2-4을 잘 보십시오. 2절과 4절 말미의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가 한 쌍의 북스탠드처럼 양쪽에 자리합니다.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 사이에 자리한 것이 무엇입니까? 애굽으로부터 구속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레위기, Lev 11:45) 마땅히 살아가야 할 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거룩한 삶입니다. 이 삶은 ‘부정’과 ‘긍정’으로 자리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애굽 땅 풍속을 따르지 말고” 또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법도를 따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지켜 행하되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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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된 신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 하나님의 계시된 법도와 규례를 따라 구별된 삶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디도서, Titus 2:14).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언약(히브리서, Heb 9:15; 누가복음, Lk 22:20) 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을 예언한 에스겔 역시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먼저 에스겔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인 행실을 본받지 말고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에스겔, Ezk 20:19).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새언약을 예언합니다(에스겔, Ezk 36:27; 37:24).

에스겔 36:27 (NKRV)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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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약속된 성령입니다(갈라디아서, Gal 3:13-14). 이 성령을 보내사 그리스도의 구속과 주되심을 믿게 하시고(고린도후서, 2 Cor 3:6, 18), 그 믿음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십니다. 이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죄책과 정죄로부터 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사(로마서, Rom 8:2-4)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히브리서, Heb 9:14).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신자에게 주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하심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더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하신 구속과 공로를 토대로 성령께서 그를 믿는 신자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새기시고 일구어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친 백성된 신자와 교회의 삶에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구원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가 아닙니다. 나의 선행과 순종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삶은 내가 구원 받은 이유와 목적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선한 일에 힘쓰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Eph 2:10)

에베소서 2:10 (NKRV)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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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과 순종이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선행과 순종은 에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하는 믿음이 맺는 열매요 결과입니다. 디도서 2:14은 이런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사 자기 백성 삼으신 이유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 안에 공통적으로 심기운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2:14 (NKRV)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모든 신자의 중심에 이글거리는 공통된 특징이 바로 이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그의 유명한 저작인 ‘신자의 정서’(Religious Affections)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된 하나님의 친백성이 갖는 참된 신앙의 열한 번째 표지로도 이 열심은 언급됩니다. 죄가 그렇듯이 죄를 이기는 유일한 묘약인 하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참된 경건은 결코 현재 자신의 상태로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과 경건의 머리요 선구자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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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거울 앞에 자신의 영혼과 가슴 깊이 자리한 숨은 열망을 비추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의 곡조를 하나님의 구속의 메트로놈과 절대음에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속하신 놀라운 뜻과 목적이 내 영혼과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나의 삶은 과연 하나님의 이 구속의 바퀴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친백성 삼으신 뜻이 내 중심과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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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과연 하나님과 그의 계시된 뜻인 말씀을 향한 열심과 열정이 있는지, 자라가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이 구속의 은택과 열매를 내 삶에서 넉넉히 발견하고 계속해서 이 일에 자라감으로 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히 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베드로후서, 2 Pet 1:8-10). 칭의없는 성화가 있을 수 없고, 성화 없는 칭의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은 결코 헛되이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법이 없습니다(이사야, Is 55:10-11).

이사야 55:10–11 (NKRV)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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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인도(사무엘하 7:3; 이사야 53:10, 11) | Discerning Lord’s Leading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셨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라든지, 혹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소위 말해서 성경과 같은 무오하고 충분한 “계시”가 있는 때도 아니고, 구약성경에서와 같은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성경 말씀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경 말씀을 그 의도대로 바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2.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계시되고 바로 이해한 성경 말씀이나 그 말씀에서 비롯된 원리를 바로 적용하는 경우입니다.

  3. 그리고 그렇게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행한 결과 어떤 일로 드러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거룩한 열망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에 보인 다윗의 태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런 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그의 후손인 예수의 삶을 통해 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과 성취는 예수의 수고의 씨로 드러날 오고오는 세대의 지배적인 특징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와 바람에 '예’는 물론 ‘아니요’로도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이나 느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항상 자신의 상황을 비추어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짓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다윗의 선한 열망에 나단 선지자가 사무엘하 7:3(2 Sam 7:3)의 말씀과 같이 대답했지만,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그것과 다른 당신의 뜻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사무엘하, 2 Sam 7: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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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것은 3절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한 나단 선지자의 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NO’에 대한 다윗의 기꺼운 순종과 찬가에서 드러납니다. 목이 메이도록 가슴벅찬 다윗의 사랑에 찬 대답을 들어보십시오(사무엘하, 2 Sam 7:18-22),

사무엘하 7:18–22 (NKRV) —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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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셨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라든지, 혹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소위 말해서 성경과 같은 무오하고 충분한 “계시”가 있는 때도 아니고, 구약성경에서와 같은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성경 말씀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경 말씀을 그 의도대로 바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2.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계시되고 바로 이해한 성경 말씀이나 그 말씀에서 비롯된 원리를 바로 적용하는 경우입니다.

  3. 그리고 그렇게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행한 결과 어떤 일로 드러난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다른 상황에서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신명기, Deut 29:29),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뜻이면 ......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고 말해야 합니다(야고보서, James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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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15 (NKRV)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진실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전 짓기를 열망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진정성과 상관없이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거룩한 열망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NO’는 다윗에 대한 거부나 거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해할 수 없지만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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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에 보인 다윗의 태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런 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그의 후손인 예수의 삶을 통해 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과 성취는 예수의 수고의 씨로 드러날 오고오는 세대의 지배적인 특징이 됩니다(이사야, Is 53:10,11).

이사야 53:10–11 (NKRV)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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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The Law of God Timothy Jang 성경묵상, The Law of God Timothy Jang

신자와 하나님의 법(Believers & The Law of God) 02 | 누가복음 6:46

산상수훈으로 시작하는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설교(누가복음 Lk 6:20-47) 말미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노라고 나선 제자들을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누가복음 Lk 6:46).

Luke 6:46 NKRV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은 그 바로 앞의 ‘나무와 그 열매’ 유비(누가복음, Lk 6:43-46)와 ‘반석 위에 지은 집’ 유비(누가복음,Lk 6:47-49) 사이에 경첩과 같이 자리합니다. 이 이야기 모두 선한 열매, 즉 고백에 부합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백의 진위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와 고백에 부합하는 순종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 6:47이 자리한 6장의 전체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에 부합하게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본훼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이라는 책에서 ‘언제든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시는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과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원하는 순종으로의 자유입니다. 당연히 ‘죄와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 고백과 짝을 이루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건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따라 구별된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에 위선자를 위한 자리가 없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입술만의 고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A. 도입

산상수훈으로 시작하는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설교(누가복음 Lk 6:20-47) 말미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노라고 나선 제자들을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누가복음 Lk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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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6:46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와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에서도 보다 길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마태복음, Mt 7:21-23).

마태복음, Matt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B. 관찰

1. 이 질문이 자리한 문맥

46절의 이 엄중한 질문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절은 말과 행위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부분으로 넘어가는 문턱과 같이 자리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술로 말합니다(마태복음, Mt. 12:34; 누가복음, Lk 6:45). 그리고 그렇게 입술로 한 말의 진실됨은 행실로, 삶의 일관된 열매로 확인됩니다(마태복음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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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Matt 7:16

누가복음 6:46은 그 바로 앞의 ‘나무와 그 열매’ 유비(누가복음, Lk 6:43-46)와 ‘반석 위에 지은 집’ 유비(누가복음, Lk 6:47-49) 사이에 경첩과 같이 자리합니다. 이 이야기 모두 선한 열매, 즉 고백에 부합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백의 진위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와 고백에 부합하는 순종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 6:47이 자리한 6장의 전체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에 부합하게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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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질문을 받는 대상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따르던 자들과 예수를 책 잡으려던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설교를 하신 대상은 “제자들”입니다(누가복음, Lk 6:20, 39절에서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에 따르면 ‘또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주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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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46절의 예수님의 물음에 비추어 볼 때 ‘너희’는 스스로 ‘제자’라 일컬으면서 정작 주님인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특정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포함됩니다. 그들의 순종 역시 일관되지 않고 중구남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저를 포함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 ’, 즉 예수를 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특별히 입술로 고백하는 주와 마음으로 쫓아가는 주가 다른 두 마음을 품고 불순종의 위험한 곡예를 삼는 모든 교인들입니다.

3. “주여, 주여”

예수님은 불순종의 위선을 살아가는 자들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묘사하면서 ‘주여’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주여, 주여’한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저들이 주님을 부를 때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까?

같은 이름을 두번이나 부르는 것은 그만큼 절박할 때 그렇게 합니다. ‘주여’라는 이름을 두번 부르는 것은 주님께 큰 영예를 돌리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데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순종을 함의하는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구주와 메시야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4. 친밀함의 표시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름이나 호칭을 두번 거푸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Gen 22:11, 46:2, 출애굽기, Ex 3:4; 사무엘상, 1 Sa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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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보면 하나같이 친밀함의 표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막 이삭을 도살하려고 칼을 들어올렸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두번 부르셨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보러 애굽으로 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야곱아 야곱아” 부르시며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고, 한 밤중에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고 압살롬을 두번 목놓아 불렀습니다(사무엘상, 2 Sa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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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역시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마태복음, Mt. 27:46). 예수께서 마르다를 위로하셨을 때도, 베드로를 경계하셨을 때도,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을 때도 두번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누가복음, Luke 10:41; 22:31; 마태복음, Matt 23:37).

 

5.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이런 수사적인 질문을 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친밀한 관계라고 하는 예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아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익숙한 대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된 자로 자처하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과 사고와 가치를 지배하는 주인은 따로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C. 적용

우리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는, 교회에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 삶으로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단적인 예로,

주께서 아내들에게 하신 명령을 따라 “주께 하듯” 남편에게 순복하는(에베소서, Eph 5:22-24; 베드로전서, 1 Pe 3:1-6) 것은 고사하고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 습관에 따라 배우자를 대하는 교회에 열심인 아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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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남편들에게 하신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양육하고 약한 그릇으로 알고 아끼기는 커녕(베드로전서, 1 Pe 3:7) 이기적으로 함부로 대하고 역정을 내고 괴팍하게 대하기가 일수인 목사, 장로, 집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골로새서, Col 3:19; 에베소서, Eph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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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되 부모에게 주신 주의 명령을 따라 주의 훈계와 양육을 도외시하고 세상의 가치와 문화와 본성을 따라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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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교회에 오래 ‘헌신’ 한들, 아무리 중직을 맡으면서 “주여, 주여” 한들, 주께서 자신에게 하신 이런 가장 근본적인 계명조차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은 다름아닌 당신에게 지금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Lk. 6:46).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이 질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신자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무지, 무관심하고,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에는 자기 뜻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하는 바를 따라 살지 않으면서 나에게 ‘주여 주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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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훼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책에서 ‘언제든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시는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과 심판과 저주’로부터의 자유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원하는 ‘순종으로의 자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도록 하는 자유’입니다. 당연히 ‘자아와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 고백과 짝을 이루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건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따라 구별된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에 위선자를 위한 자리가 없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입술만의 고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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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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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하나님의 법(Believers & The Law of God) 01 | 시편 119:103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은 선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복음과 율법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끄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몰아가고,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계시인 율법의 의로움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내달리게 하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명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빛이 없이 흑암가운데 있는 이 땅을 지나갈 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그 발의 등이요 그 길의 빛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이런 하나님의 법이 없이 우리는 흑암 속을 더듬으며 넘어지고 자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법을 통해 빛 가운데 행할 뿐 아니라 이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아가고 누리고 그를 닮아갑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아는 일에 계속해서 자라갑니다(야고보서 James 1: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힘써 구하고 배우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우리로 이 놀라운 복을 누리도록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삼위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골로새서 Col. 1:13). 

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세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의와 생명과 평안”의 법인 성경 말씀이 홀대 받는 시대입니다. 불경이 불교의 경전들이고, 코란이 이슬람의 경전이고, 바가바드 기타가 힌두교의 경전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 정도로 여깁니다. 이런 인식이 갖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다른 종교경전들과 같이 죽은 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living, 히브리서 Heb. 4:12)고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관지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믿음으로 삶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히브리서 Heb.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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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의 예배에 가면서 성경대신 코란을 들고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따라 사는 것은 의식조차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머리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실제로는 성경 이외의 모든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을 구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삶의 패턴이 희미해진지 오래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 풍조(standards)를 따르지 말고 오히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이 사회의 가치와 세계관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 불안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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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하나님을 떠난 세대의 특징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전반적이고 지배적인 모양이 될 때마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이런 특징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변의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거민들의 풍습과 가치와 삶의 방식을 모방하고 그들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법을 변개하고 세상의 풍습과 가치를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에 맞추는 왜곡과 정당화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번거롭기 짝이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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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패턴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실제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이 지속될 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더욱 더 손상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있는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C. 성경이 말하는 성경에 대한 합당한 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얼마나 상반되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는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얼마나 상반되는지요?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 교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직접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비교해 보시죠. 

1. 다윗의 예

시편 119편만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잘 드러낸 대목도 없습니다. 케빈 디영(Kevin DeYoung)은 자신의 책 Taking God at His Word에서 시편 119편을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노래를 넘어서 다윗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연애시(love poem)라고 불렀습니다(Taking God At His Word, pp. 11-15). 

a.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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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다윗의 순전한 기쁨이었습니다. 단순히 성경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다윗의 즐거움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하나님 그 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은 곧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었습니다,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47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74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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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하나님의 법을 사랑함

다윗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이 그 자체로 경이로웠기 때문이며 이런 율법을 그가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계명에 대한 사랑이 연이어 나옵니다,

48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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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하나님의 법을 열망함

사랑하는 이를 열망하듯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열망했습니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40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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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하나님의 법을 의지함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우리가 익숙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변의 태도와 너무나 이질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경이로움에 놀라고 이 말씀을 사모하고 의지합니까? 너무나 낯선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2. 바울의 예

구약시대라서 그런 것일까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신약시대에는 '율법'이 아닌 '복음'에 집중해야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까지 느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신약성경을 한 번 봅시다. 구약의 다윗에 견줄만큼 신약성경을 많이 기록한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로마서 7:6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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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복음으로 더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6절). 하지만 자세히 그의 서신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울의 마음은 다윗만큼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시대에도 율법은 구약시대만큼이나 여전히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그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으로 새롭게 된 자신의 존재의 중심('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3. 교회 역사에서의 예

성경의 계시가 종결된 지금은 다르다고요? 사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가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어두운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군데군데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도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있었습니다.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부흥이 아닌 참된 부흥의 때마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시대, 지리, 인종, 문화, 언어를 초월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이라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다름아닌 앞에서 예로든 다윗과 바울이 보여준 태도, 하나님의 법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이끌리는 사랑과 열망으로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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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부흥의 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각 부흥의 끝자락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하나님의 계명과 법에 대한 태도가 무엇입니까? 메마른 율법주의로의 전락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또 다른 극단으로서의 반율법주의의 득세입니다. 이 두 태도 모두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지배적인 특징이 그렇지 않습니까? 

D.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오해와 바른 이해

1. 오해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는 오해가 다분합니다.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원수와 거짓 교사들이 뿌려놓은 독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의 본성이 환영하는 속임입니다. 복음이 거듭난 신자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와 그 영향입니다. 

2. 바른 이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은 선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복음과 율법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끄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몰아가고,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계시인 율법의 의로움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내달리게 하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명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빛이 없이 흑암가운데 있는 이 땅을 지나갈 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그 발의 등이요 그 길의 빛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이런 하나님의 법이 없이 우리는 흑암 속을 더듬으며 넘어지고 자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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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법을 통해 빛 가운데 행할 뿐 아니라 이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아가고 누리고 그를 닮아갑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아는 일에 계속해서 자라갑니다(야고보서 James 1: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힘써 구하고 배우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우리로 이 놀라운 복을 누리도록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삼위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골로새서 Col.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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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그리고 고난자(Suffering & the Sufferer) | 로마서 2:4-6

"고난 당하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 역시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료 인간들과 같이 삶에서 초래되는 모든 정치, 사회, 물리적 어려움(질병, 사고, 고통 등) 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더이상 아담 안에서 정죄 된 죄책과 저주 아래 있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을 받고, 죄를 죄로 알아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본성적인 애착으로부터 젖을 떼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닮는 일에 더욱 자라간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런 실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이 실체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런 신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 안팎에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역사가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 역시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료 인간들과 같이 삶에서 초래되는 모든 정치, 사회, 물리적 어려움(질병, 사고, 고통 등) 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더이상 아담 안에서 정죄 된 죄책과 저주 아래 있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을 받고, 죄를 죄로 알아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본성적인 애착으로부터 젖을 떼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닮는 일에 더욱 자라간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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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런 실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이 실체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런 신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 안팎에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역사가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땅을 사는 모든 개인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더해갈수록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각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속했는지, 그 속에 자리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자기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여실히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늑대와 개, 오리와 백조가 새끼일 때는 잘 분간이 안되다가 점점 자라면서 그 모양뿐 아니라 그 본능과 성질이 확연히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듭나 둘째 아담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닮은 경건(god-likeness)으로, 여전히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연인들은 자신들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회개치 않는 본성적인 마음과 완악함을 따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상관없이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따라 삽니다.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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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인생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선’(good)과 ‘악’(evil)이라는 두 가지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도덕적인 의미의 ‘선’과 ‘악’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듣는 말마따나 인생이 겪는 ‘행’과 ‘불행’이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쉽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악’이라고 할 때는 고통과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선’ 역시 마찬가지로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상황이나 일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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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온갖 재앙과 비참함 가운데 이루어지는 욥의 탄식을 보면 ‘악’이 뜻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Job 30:26).

욥기 30:26

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선’은 시편 133기자가 하나님 백성의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흡족해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나 상황을 가리킵니다(Ps 133:1).

시편 133:1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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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선하신 분입니다. “선인”에게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그 해를 동일하게 비추십니다. “의로운 자”에게 뿐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 주십니다(Matt 5:45).

마태복음 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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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런 선하심을 깨닫고 불경건한 삶을 떠나 경건한 삶으로 돌이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사는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날을 위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해갑니다(Rom. 2:4-6).

로마서 2:4-6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지만 개인적으로든 전 우주적으로든 마지막 심판날이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오래 참으심으로 예수 안에서 믿음과 순종의 길로 돌이키라고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십니다(Luke 5:32).

Luke 5:32 NKRV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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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와 연단의 필연성

하나님은 징계와 연단으로 자기 자녀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Prov 6:23).

잠언 6:23 

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은 또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는 분이십니다(Heb 12:6).

히브리서 12:6 NKRV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장차 자녀들이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누리도록 일생동안 징계와 연단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들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래서 불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멸망과 악을 맞닥뜨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이 세상에 속한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불경건한 자들이라고 사철의 좋은 날씨와 먹거리, 건강, 가정,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을 못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자들이라고 해서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일들은 물론 애매한 핍박까지 덤으로 받습니다. 심지어 불경건한 자들의 손에 무자비하게 도륙되는 악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녀를 먼저 자신의 품에 묻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경건한 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선’과 ‘악’, ‘행’과 ‘불행’은 그 것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결정적인 근거는 아닙니다. 좋은 일들이 계속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더 받고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일이 계속해서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원치 않는 일들이 터지거나 하는 일들마다 예기치 않게 어그러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아래 있다거나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악인에게도 선을 베푸시고 경건한 자라 할지라도 징계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가지고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반드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성경을 통해 분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1 Sam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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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에 대한 좋은 예가 사무엘 상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 왕이 엔게디 광야에 다윗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숨어있는 굴로 다윗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울왕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면 더이상 도망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절제절명의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기도에 응답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그의 부하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사울 왕을 다윗의 손에 붙이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하나님이 기름 부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에게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맞설 때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했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의 뒤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삼상 24:10),

사무엘상 24:10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이처럼 우리 삶을 일구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지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 곧 자기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선한’일 이든 원치 않는 ‘악한’ 일이든, ‘번영’이든 ‘역경’이든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거듭난 경건한 신자가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이 일반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번영’이든 ‘역경’이든 주의 뜻 안에서 받으면 매 한 가지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신자가 누리는 참 자유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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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태도는 믿는자의 태도가 아니라 믿음을 빙자한 방종입니다. 그렇다면 ‘번영’이나 ‘역경’의 섭리를 마주한 신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시기를 바라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번영’이든 ‘역경’이든 내가,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맞닥뜨린 일들을 진리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이 되도록 선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의 차이

경건한 신자들은 잠시 ‘역경’을 맞닥뜨렸다고 해서 침륜에 빠지거나 자포하기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 풍조와 자신의 본성을 따라 대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잠시 ‘좋은’ 일들이 계속되고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높아지거나 자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에 이끌립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입술의 말은 청산유수로 달라질 지언정 그 속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땅에서 구가하는 안락한 삶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땅의 번영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이기에 혹여나 예기치 않은 불행이나 ‘역경’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자신을 향한 심판으로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이 길들여지고 애지중지하는 안락함과 안정감이 깨어지는 것을 더 못견뎌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마음은 요동하는 파도와 같이 정함이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곧 미친 바다와 같이 요동하는 정함이 없는 세상에 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닻을 드리우지 않아 풍랑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배와 같이 어쩔줄을 모릅니다(Is 57:20).

이사야 57:20 

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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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주어지는 ‘역경’과 ‘번영’으로 인한 가장 큰 차이는 이 일들을 지나가는 주체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역경’은 ‘역경’대로, ‘번영’은 ‘번영’대로 그것들을 지나가는 주체들에게서 하나님이 섭리가운데 그런 일들과 환경을 보내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일들을 맞닥뜨리고 지나가는 각각의 주체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느냐의 여부에 따라 ‘역경’과 ‘번영’이 그 영혼에 이루는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자와 불경건한 자가 일생토록 공히 하나님의 섭리를 살아가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영원의 간극만큼이나 다릅니다(Phil 1:27, 28)

빌립보서 1:27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어거스틴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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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이런 사실을 적실한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불이라도 금은 그 속이라도 맹렬히 빛을 발하지만 겨는 연기를 낼 뿐이다. 같은 도리깨질이라도 알곡은 겨와 분리되어 알곡으로 드러나는 반면, 볏짚은 부러지기만 할 뿐이다. 같은 압착기 아래서 기름은 결코 찌끼와 섞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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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입니까? 선한 자에게는 모든 일이 선하게, 악한 자에게는 모든 일이 악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가 처한 환경이 아닌 자신이 누구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같은 섭리아래 있더라도, 같은 고난을 지나가더라도 거듭난 경건한 신자는 이로 인해 더욱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고 더욱 더 주와 교제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반면, 불경건한 자는 이로 인해 더욱 더 완고하게 되고 주와 멀어지고 상관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불경한 행실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경건한 신자는 하나님을 더 간절히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Matt 12:35).

마태복음 12:35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여기서 “그 쌓은 선”, “그 쌓은 악”이라는 표현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가득채우고 있는 것, 그 사람이 보화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고난과 역경을 지나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역경의 섭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주가 함께 하겠지가 아니라 실제로 순간순간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그와 교통하고 동행햐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그 고난과 역경을 지나가는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Matt 12:33).

마태복음 12:33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나는 좋은 나무입니까? 좋은 나무에서만 열릴 수 있는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어거스틴의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한번만 저어도 오물은 악취를 내지만, 향료는 저을수록 사방에 달콤한 향기를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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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meditations Timothy Jang 성경묵상, meditations Timothy Jang

신자의 고난(Suffering of Believers) | 로마서 8:17

그리스도인도 여느 인생과 같이 슬픔과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경험합니다. 인간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한 동료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원인 모를 다른 무엇으로 인한 것이든 그렇습니다.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사망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고 또 구원에 이를 지언정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고 거듭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중요하고 결정적이고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지나가는 이런 온갖 경험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들의 유익이 되도록 선용하시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 자녀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더이상 심판이나 저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참 신자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감사와 소망가운데 받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5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겪는 이런 모든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경히 여기지도 말고 또 이로 인해 낙심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첫째로 이런 모든 일들은 신자들에게 재앙이나 심판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연단하고 훈육하시는 방편이고, 둘째로, 하나님이 자녀를 그렇게 징계하고 훈육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단련하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섬기도록 그들을 구비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듭난 신자의 삶에서 겪는 고통과 고난은 자녀를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고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눈을 열어 멸망받을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세상에서 젖을 떼도록 하고, 빛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길을 깨닫게 하고, 주의 선하심과 지혜와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그것을 더욱 더 사모하도록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의 방편일 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소위 말하는 눈먼 ‘재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Rom 8:1).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세속주의적 시대정신을 호흡하는 시대는 현세중심적이기 마련입니다. 그 삶의 모양뿐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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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주의와 번영, 그리고 의료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된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된 삶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질병이나 고통 죽음과 같은 것들은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 소비될 뿐, 이전 세대들에서와 같이 노상 일상에서 도사리고 있는 실체는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내 가정, 내 삶에 그런 것들이 찾아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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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아닌 세상의 풍조와 자신의 본성적이고 이기적인 야망을 좇고, 부자는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삶을 살고 또 계속해서 그것이 깨지지 않기를 열망하며 세상에서의 안정된 삶이라는 불순한 꿈을 꾸는 개인에게 질병과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이 복주신’ 고요한 일상을 깨뜨리는 훼방꾼 정도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을 이런 어려움에서 건져내셔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복음을 믿고 거듭난 신자의 삶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슬픔과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경험합니다. 인간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한 동료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원인 모를 다른 무엇으로 인한 것이든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사망을 통해 구원을 맛보고 구원에 이를 뿐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 받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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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요하고 결정적이고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지나가는 이런 온갖 경험들을 선용하시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 자녀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더이상 심판이나 저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참 신자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감사와 소망가운데 받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5(히브리서 Heb 12:5)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겪는 이런 모든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경히 여기지도 말고 또 이로 인해 낙심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첫째로 이런 모든 일들은 신자들에게 재앙이나 심판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연단하고 훈육하시는 방편이고, 둘째로, 하나님이 자녀를 그렇게 징계하고 훈육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단련하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섬기도록 그들을 구비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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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거듭난 신자의 삶에서 겪는 고통과 고난은 자녀를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고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눈을 열어 멸망받을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세상에서 젖을 떼도록 하고, 빛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길을 깨닫게 하고, 주의 선하심과 지혜와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그것을 더욱 더 사모하도록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의 방편일 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소위 말하는 눈먼 ‘재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Rom 8:1).

로마서 Romans 8:1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고통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이 인내하고 보존되는 이유

그리스도인이 고난과 고통가운데서도 보존되고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당한 고난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고통가운데 있는 자신의 지체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예. Acts 9:4–5; 1 Cor. 12:26–27).

사도행전 Acts 9:4–5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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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2:26–27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로마서 Rom. 8:17; 고린도후서 2 Cor. 1:5; 히브리서 Heb. 13:13; 베드로전서 1 Pet. 4:13), 그리스도 또한 고난당하는 자기 지체들의 연약함을 돌아보시고 도우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히브리서 Heb. 4:15; 2:18).

또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신자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그와 더불어 영광을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로마서 Rom 8:17; 베드로전서 1 Pet 4:13).

로마서 Romans 8:17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 Peter 4:13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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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고난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Acts 5:41; 로마서 Rom. 5:3)

사도행전 Acts 5:41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로마서 Romans 5:3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 가져다주는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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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아프면 큰다고들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삶의 고통을 통해 자라갑니다. 위와 같이 신자가 자기 앞에 닥친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받고 감당하는 동안 당사자인 신자는 놀라운 영적인 진보를 이루고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더욱 깊어져 갑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유익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일상을 통해 찾아오는 온갖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난을 위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약속과 실체를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복음의 능력과 자유에 대한 입체적인 증 거입니다.

a. 자기 자신에 대한 증거

무엇보다도 주를 믿는 믿음으로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믿음의 열매를 통해 그렇게 하는 신자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분명하게 증거됩니다(베드로후서 2 Pet. 1:10).

베드로전서 2 Peter 1:10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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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불신자에 대한 증거

주를 믿는 믿음으로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믿음의 열매를 통해 그것을 지켜보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이웃들에게 빛으로 드러납니다. 복음의 능력과 구원의 복을 증거합니다. 이런 것들이 결여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신자안에서 역사하는 소망의 이유와 능력에 물어오도록 도전합니다(베드로전서 1 Pet. 3:15).

베드로전서 1 Peter 3:15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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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동료 신자를 향한 증거

주를 믿는 믿음으로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믿음의 열매를 통해 그것을 지켜보는 믿는 가족들과 동료 신자들에게 도전과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동료 신자들 역시 자신들이 고난 당할 때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신자로서 경건에 더욱 힘쓰고 자신들의 삶에 더욱더 분발하도록 격려합니다(빌립보서 Phil. 1:13-14).

빌립보서 Philippians 1:13–14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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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향한 증거

주를 믿는 믿음으로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믿음의 열매를 통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증거합니다. 성경은 이것은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Eph. 3:10).

에베소서 Ephesians 3:10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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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자는 자기에게 닥치는 여러가지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오히려 신자 자신이 누리는 영광이라고 하고, 또 그것에 여러모양으로 함께 참여하는 동료 신자들의 영광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Eph. 3:13).

에베소서 Ephesians 3: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신자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고통과 고난이 “당장은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감당할 때에 시간이 감에 따라 의와 평강의 열매로 영글어 갑니다(히브리서 Heb. 12:11).

히브리서 Hebrews 12:11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천지의 주재시며 만물을 그 뜻대로 부르시는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섭리와 주권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 신자는 고난과 고통가운데서도 소망가운데 성령의 풍성한 위로를 누립니다. 그를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다는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나의 구원과 안전은 나의 감정이나 느낌, 혹은 나의 재능과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늘 아버지의 신실하고 선하신 능력이 마침내 다 이루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Phil. 1:6).

빌립보서 Philippians 1:6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Heb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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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자신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또 그렇게 고난가운데 있는 지체들의 연약한 손과 무릎을 함께 일으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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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함(Meekness), 하나님이 가장 귀히 보시는 신자의 성품 | 마태복음 5:5

신자는 ‘그리스도의 학교’라 불리는 삶의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모든 온유와 겸손의 원천이신 주 예수께서 부르십니다. 자기와 함께 멍에를 메고 직접 자기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그 멍에는 쉽고 그 분이 부르신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그 분이 주신 계명을 따라 행하십시오(1 Jn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Matt 5:5).


하늘의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시편 Ps 147:4) 하나님께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산들도 바다도 다 가지신 하나님이(시편 Ps 96:4,5)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무엇을까요? 그 앞에서는 하늘의 별도 깨끗하지 못하고(욥 Job 25:5) 천사도 그 얼굴을 가리는(이사야 Is 6:2) 하나님께서 귀히여기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하나님께 “구데기 같은 사람, 벌레같은 인생”이(욥 Job 25:6) 무엇을 드려 감동하시게 하겠습니까?

이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금, 은, 부동산, 재산, 권세, 명예, 교육, 지식, 기술, 인맥, 외모, 직장, 평판 등-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천지의 주재요 만물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부귀영화와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 하십니다(시편 Ps 1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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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이 생의 자랑이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거룩하신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겸손한 자’ 혹은 ‘온유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디도서에 따르면 온유함은 ‘화’와 반대되는 믿는자의 태도입니다(디도서 Titus 3:2). 내면의 부드러움과 인자함입니다.


디도서 Titus 3:2 

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그렇다고 해서 젤리와 같이 흐물흐물한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석과 요새시요, 피할 바위와 방패와 산성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비롯되는 강건함과 관련됩니다.

모세는 온 지면에서 온유함이 승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들어 자신의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셨을 뿐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모세가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 백성들을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모세가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인 것처럼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 백성들을 새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마태복음 Matt 11:29). 하지만 온유함은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꺼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온유함은 진정한 강함과 관련됩니다(이사야 Is 50:6-7).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으시고 그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시고 그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여 십자가를 지는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무엇보다 ‘온유함’은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는 태도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니, 온유함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삼는 심령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기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데 있었습니다(요한복음 Jn 4:34; 6:38).

참된 온유함은 더이상 자기변호를 일삼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는 아무 것도 변호할 만한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을 측은히 여기지 않습니다. 과연 예수게서 말씀하신 충성스런 종과 같이 힘써 자신의 일을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누가복음 Lk 17:10).

모세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집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가지 하나님의 집의 충성된 종들은 하나같이 '온유함’을 지배적인 성품으로 합니다(히 3:2-6).

모세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집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가지 하나님의 집의 충성된 종들은 하나같이 '온유함’을 지배적인 성품으로 합니다(히 3:2-6).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잘 압니다. 그리고 타인을 선대하고 인자하게 대합니다(야고보서 James 3:13-18).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죄책과 정죄 뿐 임을 알기에 자신을 거스른 사람에 대해 악감을 품을 생각도 못합니다.

온유함은 어떤 종류의 자기만족이나 자존감, 혹은 자긍심도 갖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만족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물고 먹히는 경쟁이나 자기추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음으로 만족할 줄 압니다(디모데전서 1 Tim 6:8).

온유함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가장 닮은 태도요, 독생자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드러나는 거듭난 영혼의 품성입니다. 그 안에 독생자의 성령이 충만히 거하심으로 그의 삶에서 맺어지는 초자연적인 열매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암송하는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의 목록(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기,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갈라디아서 Gal 5:22-23)은 하나같이 온유함을 동의어로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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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삶이라는 나무에 맺힌 성령의 열매들은 모양과 이름은 다르지만 ‘온유함’이라는 공통된 자양분을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온유한 성품의 대척점에 있는 성품으로 정욕과 화를 들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 성령의 열매라면 정욕과 화는 육체의 열매입니다. 마음에 맺히는 마귀의 열매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를 따르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을 얕잡아보고 깔보기 일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온유한 사람이 가장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유한 자는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습니다(잠언 Prov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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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일(아내, 남편, 부모, 교회의 지체, 이웃, 일터, 직장 동료, 학교, 목사, 집사, 장로 등 무엇이 되었든)에 신실하고 충성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모든 겸손과 온유로” 각자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힘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길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Eph 4:1-2).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습니까? 그렇다며 무엇보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이 온유함이라는 은혜로 자기 마음을 장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유함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1 Pet 3:4).

그 속사람을 모든 겸손과 온유로 장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 앞에 가장 값진 보화라고 합니다(벧전 3:4).

그 속사람을 모든 겸손과 온유로 장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 앞에 가장 값진 보화라고 합니다(벧전 3:4).

그러나 온유함은 또한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주 매력적인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람들의 마음을 끕니다. 어떤 직장 동료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까? 어떤 아내와 살고 싶습니까? 어떤 남편과 살고 싶습니까? 아내가 어떤 아내로 드러나기를 바랍니까? 남편이 어떤 남편으로 드러나기를 바랍니까? 자녀가 어떤 자녀로 자라가기를 바랍니까? 어떤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온유한 아내, 온유한 남편, 온유한 직원, 온유한 상사, 온유한 부모, 온유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으로 자라가고 있습니까(마태복음 Matt 7:12)?


마태복음 Matthew 7:12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주께서 보여주신 온유함을 닮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온유함에 자라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도 온유한 자의 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너무나 감사하게도 길이 있습니다. 모호하고 막연하지 않은 너무나 분명한 초청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Matt 11:29-30).

신자는 ‘그리스도의 학교’라 불리는 삶의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신자는 ‘그리스도의 학교’라 불리는 삶의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모든 온유와 겸손의 원천이신 주 예수께서 부르십니다. 자기와 함께 멍에를 메고 직접 자기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그 멍에는 쉽고 그 분이 부르신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그 분이 주신 계명을 따라 행하십시오(요한일서 1 Jn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Matt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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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재하심 1 | 신자의 위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지만, 신자들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시편 139:1-12

'편재'(omnipresence)라는 말은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과 같이 성경에는 단 한차례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편재'하심 역시 성경 전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편재'는 한 곳에 있는 것처럼 각각의 모든 곳에서 동시에 계시며 항상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과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그렇게 계시는 분으로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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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주로 계십니다. 아무도 그가 보지 못하는 곳으로, 그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 그를 피해 숨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인 자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 속에도 자리하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조성되고 있을 때조차 우리를 아셨으며 태어나 살아갈 우리의 남은 날들도 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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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이런 하나님께 탄복해 마지않는 시편 139편의 노래가 당신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알면서도 그 길을 저버리고 은밀히 제길로 다니기를 일삼는 사람이라면 이 시편만큼 두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반역의 싸움을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시 139:1-6).

  • 하나님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 그곳에 계십니다(시139:13-16).

  •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을 보십니다(시 139:17-18).

  • 하나님은 당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압니다(시 139:19-22).

  • 하나님은 당신이 욕망하는 바를 압니다(시 139:23-24).

분명한 것은 어느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깨끗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하늘의 별도 깨끗치 못하고 달도 순전하지 못합니다(욥 25:5). 천사도 그의 얼굴을 가립니다(사 6:2-3).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편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지 않은, 하나님을 운운하지만 여전히 자기길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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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수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때문이었음을 믿고, 그의 부활이 자신의 죄용서를 확증한 의의 증거라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된 믿음과 회개의 삶을 사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편재는 크나큰 위로입니다. 더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신자의 삶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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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죄인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지만, 신자들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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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재하심 2 | 존재. 지식. 능력

It all begins with an idea.

앞전 영상과 글에서 우리는 시편 139:1-12을 통해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해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질 세 번째 동영상에서는 이런 사실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드러나야 할 지를 보겠습니다.

A. 하나님의 편재하심-정리

빌헬무스 아브라켈은 얼마전 한국에서 번역출판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Christian’s Reasonable Service)에서 하나님의 편재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편재하심은 같은 의미다. 다만 하나님의 편재라고 할 때는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관련하여 어디에나 계시는 장소와 관련된 무한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편재는 장소와 관련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편재는 장소와 관련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편재란 온 우주 어디에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일상에서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왜 신자에게 중요합니까?

미디안 사람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에까지 팔려내려간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요셉이 한 대답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의 진리안에 사는 신자의 안전과 삶을 잘 보여줍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그것도 히브리 소년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Gen 39:9)

고대 애굽의 노예의 신분에서도 요셉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았습니다.

고대 애굽의 노예의 신분에서도 요셉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또 어떻습니까? 자신들의 나라는 사라지고 포로로 잡혀온 처지지만 그들에게는 유다의 멸망이 곧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그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Dan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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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재는 업으로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은 이처럼 신자의 경건한 삶과 직결되어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Ps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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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면 도움이 됩니다:

1.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디에나 동일하게 계십니다.

나누이거나 분리됨이 없이 모든 곳에 항상 온전한 본질로 계십니다.

2.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영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무엇도 하나님이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조차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인식과 의식을 넘어서 인지하지 못하는 것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3.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디나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모든 일가운데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디나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은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인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시 50:21).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은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인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시 50:21).


B. 하나님의 편재하심-확장

1. 온 우주 만물이 그 안에 존재합니다.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물리적인 것들은 물론 영적인 것들 모두 하나님 안에서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설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합니다(Acts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사도행전 17:28, N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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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as even some of your own poets have said, “ ‘For we are indeed his offspring.’

(Acts 17:28, ESV)

이런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함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토대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니 참으로 미련함중의 미련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내가 존재하는 것, 내가 오늘을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살게 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 본심에 “하나님은 없다”고 이르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Ps 14:1).

자신의 존재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를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를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2.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반영

인간의 본성에서 드러나고 발휘되는 모든 지혜와 총명은 다름아닌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반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신의 지각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비록 타락하여 어그러지고 뒤틀리고 제한적이기는 해도 어슴프레하게 나마 그들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각은 여전히 인간을 짐승과 다르게 하는 중요한 요소중 하나입니다.

“For although they knew God, they did not honor him as God or give thanks to him, but they became futile in their thinking, and their foolish hearts were darkened.” (Romans 1:21, ESV)

For although they knew God, they did not honor him as God or give thanks to him, but they became futile in their thinking, and their foolish hearts were darkened.” (Romans 1:21, ESV)

3. 하나님의 능력의 반영

인간의 본성과 자연에서 드러나는 모든 효력과 능력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의 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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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은 '하나님의 편재하심' 마지막으로 이 교리가 우리 생각과 삶과 안목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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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 | 예레미야 29:4-7

It all begins with an idea.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9:4-7)

하나님은 모든 새로운 시작의 원천이고 주재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그것도 온 세상에 드리운 모든 타락과 부패의 원흉인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이란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합니까?

엄밀히 말하면 인간에게, '자연'에 '새로운 시작'이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건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부패와 죄책으로 오염된 세상에 과거와 절연된, 죄의 영향과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시작이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이신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새 시작을 주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으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창조입니다.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는 말씀만 발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새창조를 위해서는 독생자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았어야 했습니다. 영적인 새창조, 모든 진정한 새 시작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그의 피가 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런 진정한 새시작, 새창조를 사는 새로운 피조물인 신자는 날마다 그를 힘입어 새로운 시작의 삶, 회개의 연속인 삶을 삽니다.

과연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요 13:10). 하나님은 과연 모든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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