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2 장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공금을 맡은 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것을 신실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결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결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방만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재정 사용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자신의 모사로 두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왕의 목숨을 구한 여호사브앗의 남편이었습니다(대하 22:11). 여호야다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왕하 11:12)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열왕기하 11:12, NKRV).
열왕기하 7 장
이 문둥병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좋은 소식을 자기들만의 것으로 가두어두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이었기에 얼마나 서럽고 멸시와 차별을 받았을 것이지만, 이들이 한 행동을 보십시오. ‘그렇게 우리를 차별하더니 어디 당해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앙심과 악감은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혹시 신자라고 하면서 여전히 원한을 풀지 않고 악감과 앙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인지 물어야 합니다. 말세의 사람들의 특징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무정”하고 “사나우며” 자신이 품은 “원한”을 풀지 않고 “모함”을 일삼습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비방하며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 사나우며 ......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NKRV).
열왕기하 5 장
나아만에게 일어난 이적에는 종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린 히브리 여종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녀의 증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도록 합니다. 나아만의 종들은 그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도록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의 순종으로 나아만은 나음을 얻고 여호와를 믿습니다.
이 겸손하지만 지혜롭고 담대한 어린 여종을 보십시오. 자신의 적국의 장군이고 종으로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아만이 치료받고 여호와를 믿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당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섬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주와 함께 동행하고 그를 의지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요 15:15).
열왕기하 4 장
엘리사의 종 게하시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는 영적으로 쇄락하는 사람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스스로 자기를 보존하고 스스로 자신의 것을 챙기고 탐심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신이 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기 방식대로 자기가 원하는 때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 이런 사람들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것과 그것을 얻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기 때문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지 않습니다. 자신이 신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언제고 고스란히 쓰디쓴 열매를 맞이합니다.
열왕기하 3 장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하는 것 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온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다고 하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알고 있고, 그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온전하고 정확합니까? 또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무수히 많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의 뜻을 배우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과 동맹을 맺었습니다(왕상 22). 잘못된 동맹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이 일 때문에 여호사밧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사밧 왕이 개입된 사실로 인해 엘리사는 곤경에 처한 그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에 등불을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윗과의 언약때문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 장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사의 사역은 “돌아가라”는 엘리야의 말과 더불어 시작됩니다(왕상 19:20). 이제 엘리야는 “여기 머물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돌아가지 않고 신실하게 남아서 약 십년 동안 엘리야를 섬겼습니다. 엘리사는 베델이나 여리고에서 머물지 않고 엘리야와 끝까지 동행합니다. 만약 벧엘이나 여리고에 머물러 있었다면 엘리사는 많은 것을 놓쳤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구경꾼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역사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경을 알고 교회를 오래다녀 많은 지식이 있다고 한들, 우리 삶에서 변화를 일구어내지 못하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