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시험’ (야고보서 1:13-18) | 야고보서 #10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없듯, 이 땅에 속한 것들로는 이 땅에서 당하는 이런 시험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야 합니다.

I. ‘유혹’으로서의 시험

지금까지 야고보는 신자가 어떻게 ‘시험’(trials)과 시련을 맞이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신자에게 주어진 위로넘치는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또 다른 종류의 ‘시험’(temptation)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한글로 ‘시험’이라는 말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신자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유혹’을 가리길 때도 사용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주제가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험과 시련이라고 하는 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을 지나가는 신자들을 더욱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상황을 틈타 찾아오는 내면의 유혹과 잘못된 사고와 판단,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과 어둠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사십일을 광야에서 주리셨습니다. 바로 그 때 마귀는 예수님을 찾아와 돌을 떡덩이로 만들라 유혹했습니다. 다윗의 시편들은 그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를 지나가면서 쓴 것들이 많습니다. 이 시편들을 보면 그런 시련을 지나는 다윗의 이런 내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아삽의 시인 시편 73편이 신자가 겪는 이런 내면의 유혹을 잘 보여줍니다.

마귀의 속임, 우리 육체의 속임, 세상의 속임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기막히게 세련되고 정말 그럴 듯하게 변장하고 찾아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더욱 어렵도록 하는 것은 이런 유혹이 찾아드는 시점입니다. 아무 때나 그렇게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십일을 주리셨을 때와 같이, 다윗이 왕궁 옥상에서 거닐 때와 같이, 아삽이 온갖 불경건과 불의한 환경에 압도되어버린 때와 같이 신자가 가장 취약하고 어려운 때를 콕 찝어 득달같이 찾아옵니다.

따라서 유혹을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수시로 맞닥뜨리는 시험과 시련의 때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를 유익하게 하는 방식으로 지나갈 수 있는 핵심입니다. 

II. ‘유혹’에 감추인 또 다른 이빨: 속임

또 다른 성격의 유혹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혹이 때를 따라 거짓으로 신자들을 낙담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이런 유혹은 사람들을 더욱 더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세속적인 삶으로 이끕니다. 최악의 경우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돌이킬 기회조차 잃어버립니다. 이런 유혹이 더욱 악한 이유입니다. 

실상은 하나님께 주목하지도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신다고 착각합니다. 실상은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착각합니다.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자로 살고있지 않으면서,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듣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이루 셀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런 속임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해서 느끼게 하지 않으시면 이런 개인 스스로는 돌이킬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전혀 소망이 없는 인생으로 살다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한번 속기 시작한 사람들은 전혀 돌이킬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들어야 할 진리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이상 참아보지 못합니다.

수많은 의로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중에서 그토록 환영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무엇때문입니까? 빛이 세상에 왔으나 정작 흑암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로부터는 전혀 환영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데 반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찾는 자가 아주 적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 비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주 크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넓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마태복음, Mt 7:13-14). 그만큼 속임과 기만이 팽배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요소요소에 자리하고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임네’하고 내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략질 하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마태복음, Mt 7:15).

그들의 아비요 괴수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마귀는 또 어떻습니까(에베소서, Eph 2:2)?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고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고린도후서, 2 Co 4:4)?

그럼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게 이리저리 치이는 그저 피해자에 불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과 육체의 본성은 맞장구를 치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연일 아우성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민수기, Num 14:2)

불타 없어지기 위하여 예비된 세상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무례함과 이 세상풍조를 따르라는 압력은 또 어떻습니까(로마서, Rom 12:2)?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살펴볼 유혹으로서의 이런 기만적인 시험에 대한 야고보서의 가르침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닙니까?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없듯, 이 땅에 속한 것들로는 이 땅에서 당하는 이런 시험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야 합니다. 다음 포스트부터는 함께 이 지혜를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트리니티 뱁티스트(Trinity Baptist)

#시험 #유혹 #속임 #temptation #Jam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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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가 말하는 복있는 사람 (야고보서 1:10-12) | 야고보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