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와 하나님의 법(Believers & The Law of God) 02 | 누가복음 6:46

A. 도입

산상수훈으로 시작하는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설교(누가복음 Lk 6:20-47) 말미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노라고 나선 제자들을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누가복음 Lk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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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6:46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와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에서도 보다 길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마태복음, Mt 7:21-23).

마태복음, Matt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B. 관찰

1. 이 질문이 자리한 문맥

46절의 이 엄중한 질문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절은 말과 행위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부분으로 넘어가는 문턱과 같이 자리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술로 말합니다(마태복음, Mt. 12:34; 누가복음, Lk 6:45). 그리고 그렇게 입술로 한 말의 진실됨은 행실로, 삶의 일관된 열매로 확인됩니다(마태복음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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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Matt 7:16

누가복음 6:46은 그 바로 앞의 ‘나무와 그 열매’ 유비(누가복음, Lk 6:43-46)와 ‘반석 위에 지은 집’ 유비(누가복음, Lk 6:47-49) 사이에 경첩과 같이 자리합니다. 이 이야기 모두 선한 열매, 즉 고백에 부합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백의 진위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와 고백에 부합하는 순종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 6:47이 자리한 6장의 전체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에 부합하게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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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질문을 받는 대상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따르던 자들과 예수를 책 잡으려던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설교를 하신 대상은 “제자들”입니다(누가복음, Lk 6:20, 39절에서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에 따르면 ‘또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주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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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46절의 예수님의 물음에 비추어 볼 때 ‘너희’는 스스로 ‘제자’라 일컬으면서 정작 주님인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특정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포함됩니다. 그들의 순종 역시 일관되지 않고 중구남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저를 포함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 ’, 즉 예수를 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특별히 입술로 고백하는 주와 마음으로 쫓아가는 주가 다른 두 마음을 품고 불순종의 위험한 곡예를 삼는 모든 교인들입니다.

3. “주여, 주여”

예수님은 불순종의 위선을 살아가는 자들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묘사하면서 ‘주여’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주여, 주여’한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저들이 주님을 부를 때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까?

같은 이름을 두번이나 부르는 것은 그만큼 절박할 때 그렇게 합니다. ‘주여’라는 이름을 두번 부르는 것은 주님께 큰 영예를 돌리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데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순종을 함의하는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구주와 메시야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4. 친밀함의 표시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름이나 호칭을 두번 거푸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Gen 22:11, 46:2, 출애굽기, Ex 3:4; 사무엘상, 1 Sa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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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보면 하나같이 친밀함의 표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막 이삭을 도살하려고 칼을 들어올렸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두번 부르셨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보러 애굽으로 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야곱아 야곱아” 부르시며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고, 한 밤중에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고 압살롬을 두번 목놓아 불렀습니다(사무엘상, 2 Sa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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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역시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마태복음, Mt. 27:46). 예수께서 마르다를 위로하셨을 때도, 베드로를 경계하셨을 때도,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을 때도 두번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누가복음, Luke 10:41; 22:31; 마태복음, Matt 23:37).

 

5.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이런 수사적인 질문을 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친밀한 관계라고 하는 예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아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익숙한 대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된 자로 자처하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과 사고와 가치를 지배하는 주인은 따로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C. 적용

우리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는, 교회에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 삶으로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단적인 예로,

주께서 아내들에게 하신 명령을 따라 “주께 하듯” 남편에게 순복하는(에베소서, Eph 5:22-24; 베드로전서, 1 Pe 3:1-6) 것은 고사하고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 습관에 따라 배우자를 대하는 교회에 열심인 아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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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남편들에게 하신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양육하고 약한 그릇으로 알고 아끼기는 커녕(베드로전서, 1 Pe 3:7) 이기적으로 함부로 대하고 역정을 내고 괴팍하게 대하기가 일수인 목사, 장로, 집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골로새서, Col 3:19; 에베소서, Eph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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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되 부모에게 주신 주의 명령을 따라 주의 훈계와 양육을 도외시하고 세상의 가치와 문화와 본성을 따라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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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교회에 오래 ‘헌신’ 한들, 아무리 중직을 맡으면서 “주여, 주여” 한들, 주께서 자신에게 하신 이런 가장 근본적인 계명조차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은 다름아닌 당신에게 지금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Lk. 6:46).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이 질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신자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무지, 무관심하고,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에는 자기 뜻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하는 바를 따라 살지 않으면서 나에게 ‘주여 주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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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훼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책에서 ‘언제든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시는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과 심판과 저주’로부터의 자유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원하는 ‘순종으로의 자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도록 하는 자유’입니다. 당연히 ‘자아와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 고백과 짝을 이루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건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따라 구별된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에 위선자를 위한 자리가 없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입술만의 고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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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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