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 meditations Timothy Jang 성경묵상, meditations Timothy Jang

신자의 삶에서의 칭의와 성화(레 18:2-4, Justification & Sanctification in the Life of Believers)

칭의와 성화에 대한 혼동과 오해와 왜곡은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교회가 자리한 사회에 많은 치명적인 비극과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이로 인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이로 인해 신자라고 일컫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가운데 죄에 종노릇하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구원을 위한 방편이나 도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계명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물론 구약의 가르침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와 의무로 자리할 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공로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순종을 칭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위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 혹은 거룩이요, 이것은 곧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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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구원을 위한 방편이나 도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계명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물론 구약의 가르침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와 의무로 자리할 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공로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순종을 칭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위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 혹은 거룩이요, 이것은 곧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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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구속되어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이제 더이상 자신들이 나온 애굽의 문화와 풍습을 따라 살아서도 안되고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와 풍습을 따라 살면 안되었습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 되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법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레위기, Le 18:2-4).

레위기 18:2–4 (NKRV)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4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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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열방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남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통해 온 열국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실 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그 장막 안에 온 열국을 포함하도록 거룩한 장막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Gen 28:14; 12:3).

창세기 28:14 (NKRV)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첫째 아담이 실패했던 것처럼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이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공고히 섭니다(로마서, Rom 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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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를(히브리서, Heb 3:3)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불러모으셨습니다. 바로의 손아귀에 있던 이스라엘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해 내신 것과 같이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게 종노릇 하던 당신의 택정한 자들을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사 자기 백성 삼으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구별된 친백성으로서 더 이상 음란하고 타락한 이 세상의 풍속과 규례가 아닌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그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백성을 통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 그의 긍휼과 사랑으로 충만케 하고자 함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레위기 18:2-4을 잘 보십시오. 2절과 4절 말미의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가 한 쌍의 북스탠드처럼 양쪽에 자리합니다.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 사이에 자리한 것이 무엇입니까? 애굽으로부터 구속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레위기, Lev 11:45) 마땅히 살아가야 할 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거룩한 삶입니다. 이 삶은 ‘부정’과 ‘긍정’으로 자리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애굽 땅 풍속을 따르지 말고” 또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법도를 따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지켜 행하되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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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된 신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 하나님의 계시된 법도와 규례를 따라 구별된 삶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디도서, Titus 2:14).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언약(히브리서, Heb 9:15; 누가복음, Lk 22:20) 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을 예언한 에스겔 역시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먼저 에스겔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인 행실을 본받지 말고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에스겔, Ezk 20:19).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새언약을 예언합니다(에스겔, Ezk 36:27; 37:24).

에스겔 36:27 (NKRV)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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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약속된 성령입니다(갈라디아서, Gal 3:13-14). 이 성령을 보내사 그리스도의 구속과 주되심을 믿게 하시고(고린도후서, 2 Cor 3:6, 18), 그 믿음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십니다. 이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죄책과 정죄로부터 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사(로마서, Rom 8:2-4)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히브리서, Heb 9:14).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신자에게 주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하심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더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하신 구속과 공로를 토대로 성령께서 그를 믿는 신자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새기시고 일구어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친 백성된 신자와 교회의 삶에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거룩한 삶, 경건한 삶,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구원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가 아닙니다. 나의 선행과 순종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삶은 내가 구원 받은 이유와 목적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선한 일에 힘쓰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Eph 2:10)

에베소서 2:10 (NKRV)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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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과 순종이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선행과 순종은 에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하는 믿음이 맺는 열매요 결과입니다. 디도서 2:14은 이런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사 자기 백성 삼으신 이유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 안에 공통적으로 심기운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2:14 (NKRV)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모든 신자의 중심에 이글거리는 공통된 특징이 바로 이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그의 유명한 저작인 ‘신자의 정서’(Religious Affections)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된 하나님의 친백성이 갖는 참된 신앙의 열한 번째 표지로도 이 열심은 언급됩니다. 죄가 그렇듯이 죄를 이기는 유일한 묘약인 하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참된 경건은 결코 현재 자신의 상태로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과 경건의 머리요 선구자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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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거울 앞에 자신의 영혼과 가슴 깊이 자리한 숨은 열망을 비추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의 곡조를 하나님의 구속의 메트로놈과 절대음에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속하신 놀라운 뜻과 목적이 내 영혼과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나의 삶은 과연 하나님의 이 구속의 바퀴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친백성 삼으신 뜻이 내 중심과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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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과연 하나님과 그의 계시된 뜻인 말씀을 향한 열심과 열정이 있는지, 자라가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이 구속의 은택과 열매를 내 삶에서 넉넉히 발견하고 계속해서 이 일에 자라감으로 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히 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을 명령합니다(베드로후서, 2 Pet 1:8-10). 칭의없는 성화가 있을 수 없고, 성화 없는 칭의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은 결코 헛되이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법이 없습니다(이사야, Is 55:10-11).

이사야 55:10–11 (NKRV)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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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하나님의 법(Believers & The Law of God) 02 | 누가복음 6:46

산상수훈으로 시작하는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설교(누가복음 Lk 6:20-47) 말미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노라고 나선 제자들을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누가복음 Lk 6:46).

Luke 6:46 NKRV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은 그 바로 앞의 ‘나무와 그 열매’ 유비(누가복음, Lk 6:43-46)와 ‘반석 위에 지은 집’ 유비(누가복음,Lk 6:47-49) 사이에 경첩과 같이 자리합니다. 이 이야기 모두 선한 열매, 즉 고백에 부합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백의 진위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와 고백에 부합하는 순종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 6:47이 자리한 6장의 전체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에 부합하게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본훼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이라는 책에서 ‘언제든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시는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과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원하는 순종으로의 자유입니다. 당연히 ‘죄와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 고백과 짝을 이루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건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따라 구별된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에 위선자를 위한 자리가 없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입술만의 고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A. 도입

산상수훈으로 시작하는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설교(누가복음 Lk 6:20-47) 말미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노라고 나선 제자들을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누가복음 Lk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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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6:46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와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에서도 보다 길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마태복음, Mt 7:21-23).

마태복음, Matt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B. 관찰

1. 이 질문이 자리한 문맥

46절의 이 엄중한 질문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절은 말과 행위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부분으로 넘어가는 문턱과 같이 자리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술로 말합니다(마태복음, Mt. 12:34; 누가복음, Lk 6:45). 그리고 그렇게 입술로 한 말의 진실됨은 행실로, 삶의 일관된 열매로 확인됩니다(마태복음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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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Matt 7:16

누가복음 6:46은 그 바로 앞의 ‘나무와 그 열매’ 유비(누가복음, Lk 6:43-46)와 ‘반석 위에 지은 집’ 유비(누가복음, Lk 6:47-49) 사이에 경첩과 같이 자리합니다. 이 이야기 모두 선한 열매, 즉 고백에 부합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백의 진위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와 고백에 부합하는 순종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 6:47이 자리한 6장의 전체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에 부합하게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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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질문을 받는 대상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따르던 자들과 예수를 책 잡으려던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설교를 하신 대상은 “제자들”입니다(누가복음, Lk 6:20, 39절에서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에 따르면 ‘또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주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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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46절의 예수님의 물음에 비추어 볼 때 ‘너희’는 스스로 ‘제자’라 일컬으면서 정작 주님인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특정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포함됩니다. 그들의 순종 역시 일관되지 않고 중구남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저를 포함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 ’, 즉 예수를 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특별히 입술로 고백하는 주와 마음으로 쫓아가는 주가 다른 두 마음을 품고 불순종의 위험한 곡예를 삼는 모든 교인들입니다.

3. “주여, 주여”

예수님은 불순종의 위선을 살아가는 자들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묘사하면서 ‘주여’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주여, 주여’한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저들이 주님을 부를 때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까?

같은 이름을 두번이나 부르는 것은 그만큼 절박할 때 그렇게 합니다. ‘주여’라는 이름을 두번 부르는 것은 주님께 큰 영예를 돌리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데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순종을 함의하는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구주와 메시야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4. 친밀함의 표시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름이나 호칭을 두번 거푸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Gen 22:11, 46:2, 출애굽기, Ex 3:4; 사무엘상, 1 Sa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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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보면 하나같이 친밀함의 표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막 이삭을 도살하려고 칼을 들어올렸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두번 부르셨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보러 애굽으로 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야곱아 야곱아” 부르시며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고, 한 밤중에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알고 압살롬을 두번 목놓아 불렀습니다(사무엘상, 2 Sa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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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역시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마태복음, Mt. 27:46). 예수께서 마르다를 위로하셨을 때도, 베드로를 경계하셨을 때도,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을 때도 두번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누가복음, Luke 10:41; 22:31; 마태복음, Matt 23:37).

 

5.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이런 수사적인 질문을 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친밀한 관계라고 하는 예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아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익숙한 대로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된 자로 자처하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과 사고와 가치를 지배하는 주인은 따로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C. 적용

우리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는, 교회에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 삶으로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단적인 예로,

주께서 아내들에게 하신 명령을 따라 “주께 하듯” 남편에게 순복하는(에베소서, Eph 5:22-24; 베드로전서, 1 Pe 3:1-6) 것은 고사하고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 습관에 따라 배우자를 대하는 교회에 열심인 아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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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남편들에게 하신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양육하고 약한 그릇으로 알고 아끼기는 커녕(베드로전서, 1 Pe 3:7) 이기적으로 함부로 대하고 역정을 내고 괴팍하게 대하기가 일수인 목사, 장로, 집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골로새서, Col 3:19; 에베소서, Eph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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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되 부모에게 주신 주의 명령을 따라 주의 훈계와 양육을 도외시하고 세상의 가치와 문화와 본성을 따라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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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교회에 오래 ‘헌신’ 한들, 아무리 중직을 맡으면서 “주여, 주여” 한들, 주께서 자신에게 하신 이런 가장 근본적인 계명조차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은 다름아닌 당신에게 지금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Lk. 6:46).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이 질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신자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무지, 무관심하고,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에는 자기 뜻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하는 바를 따라 살지 않으면서 나에게 ‘주여 주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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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훼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책에서 ‘언제든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시는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과 심판과 저주’로부터의 자유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원하는 ‘순종으로의 자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도록 하는 자유’입니다. 당연히 ‘자아와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 고백과 짝을 이루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건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따라 구별된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에 위선자를 위한 자리가 없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입술만의 고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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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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