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가해성’ (Divine Incomprehensibility, 욥기 11:7)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관련하여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인생과 같이 여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나타내신 말씀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핑계로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극단의 다른 쪽 끝은 닿아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이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살펴볼 주제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입니다. ‘불가해’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담화 혹은 하나님에 대한 기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신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교제하도록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죄로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에게 보이셨고(로마서, Rom 1:19), 그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십니다(에베소서, Eph 1:5).

하나님이 사람을 짐승과 달리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복되심을 누림으로 온 땅을 그의 영광의 선하심으로 인한 칭송으로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짐승과 달리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복되심을 누림으로 온 땅을 그의 영광의 선하심으로 인한 칭송으로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Rom 1:19 (NKRV)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에베소서, Eph 1:5 (NKRV)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 하나님의 불가해성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란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총체적으로 혹은 충분히 이해하거나 기술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피조물의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묘사되거나 기술되거나 이해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의 시작과 존재, 본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속성 모두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그 대상을 완전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심지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 아는 것 조차 심각하게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압니다.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알 뿐 아니라 잘못 이해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하물며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피조물인 우리가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이라는 것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가해’합니다(욥기, Job 11:7).

욥기, Job 11:7 NKRV

7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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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불가해성’의 이유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불가해성’은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에 어떤 결함이나 불완전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부러 자신을 숨겨서 알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일부러 알지 못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불가해성이란 그런 인격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서가 아닌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적인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불가해한 것은 하나님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사람의 눈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이”시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 Tim 6:16).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지성으로 신적인 본성을 알려고 하는 것은 박쥐가 태양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형용모순으로 들릴정도로 정도로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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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 지성으로 신적인 본성을 알려고 하는 것은 박쥐가 태양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

여기에 죄와 부패의 문제까지 더해져서 인간이 신적인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이중적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피조물로서의 본성적이고 존재적인 유한함과 더불은 죄로 인해 부패하고 왜곡되고 어두워진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유한할 뿐 아니라 그마저도 뒤틀리고 왜곡되고 어두워져버린 죄의 본성으로는 신적인 본성을 조금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온갖 미신과 우상들로 바꾸어 버릴 뿐입니다(로마서, Rom 1:25).

로마서, Rom 1:25 NKRV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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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본성을 완전히 아십니다. 당연한 말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인 나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압니까? 완전히 아는 것은 고사하고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철학자들이 고대로부터 끝도 없이 탐구해온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인가?’(What is man?), ‘나는 누구인가?’ 가 아닙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하는 ‘네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슬로건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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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나님은 인생과 달리 완전한 자신의 신성을 완전히 아시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알려주시고 나타내 주실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어진 우리 인간들 역시 아무리 어린 자녀라고 해도 그 입을 열어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해주지 않으면 부모는 짐작만 할 뿐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신을 합당하게 알고 누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친히 행하시는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친히 말씀합니다(사도행전, Act 17:27),

사도행전 17:27 (NKRV)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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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천지만물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그 속에서도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 인간은하나님의 이런 진리를 억누르고 왜곡할 뿐입니다(로마서, Rom 1:20-24). 하나님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소망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연과 역사, 인간의 본성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물론 옛적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Heb 1:1-3; 로마서, Rom 5:8).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자기를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신 지금은 성령께서 영감하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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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영생은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Jn 17:3).

요한복음, Jn 17:3 NKRV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Jn 1:18 NKRV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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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또 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와 생명입니다(요한복음, Jn 14:6).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자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도 없습니다(디모데후서, 2 Tim 3:15).

디모데후서, 2 Tim 3:15 NKRV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리고 이 지혜는 다름아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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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God’s Existence, 히 11:6) | 모두를 위한 신학(T4All)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