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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불가해성’ (Divine Incomprehensibility, 욥기 11:7)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란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총체적으로 혹은 충분히 이해하거나 기술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피조물의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묘사되거나 기술되거나 이해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의 시작과 존재, 본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속성 모두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그 대상을 완전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심지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 아는 것 조차 심각하게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압니다.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알 뿐 아니라 잘못 이해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하물며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피조물인 우리가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이라는 것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가해’합니다(욥기, Job 11:7).

욥기 11:7 (NKRV)

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관련하여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인생과 같이 여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나타내신 말씀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핑계로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극단의 다른 쪽 끝은 닿아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이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살펴볼 주제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입니다. ‘불가해’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담화 혹은 하나님에 대한 기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신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교제하도록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죄로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에게 보이셨고(로마서, Rom 1:19), 그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십니다(에베소서, Eph 1:5).

하나님이 사람을 짐승과 달리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복되심을 누림으로 온 땅을 그의 영광의 선하심으로 인한 칭송으로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짐승과 달리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복되심을 누림으로 온 땅을 그의 영광의 선하심으로 인한 칭송으로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Rom 1:19 (NKRV)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에베소서, Eph 1:5 (NKRV)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 하나님의 불가해성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란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총체적으로 혹은 충분히 이해하거나 기술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피조물의 어떤 언어로도 충분히 묘사되거나 기술되거나 이해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대상의 시작과 존재, 본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속성 모두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그 대상을 완전히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심지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 아는 것 조차 심각하게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압니다.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 알 뿐 아니라 잘못 이해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하물며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피조물인 우리가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이라는 것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가해’합니다(욥기, Job 11:7).

욥기, Job 11:7 NKRV

7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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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불가해성’의 이유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불가해성’은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에 어떤 결함이나 불완전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부러 자신을 숨겨서 알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일부러 알지 못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불가해성이란 그런 인격적이고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서가 아닌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적인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불가해한 것은 하나님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사람의 눈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이”시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 Tim 6:16).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지성으로 신적인 본성을 알려고 하는 것은 박쥐가 태양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형용모순으로 들릴정도로 정도로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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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 지성으로 신적인 본성을 알려고 하는 것은 박쥐가 태양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

여기에 죄와 부패의 문제까지 더해져서 인간이 신적인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이중적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피조물로서의 본성적이고 존재적인 유한함과 더불은 죄로 인해 부패하고 왜곡되고 어두워진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유한할 뿐 아니라 그마저도 뒤틀리고 왜곡되고 어두워져버린 죄의 본성으로는 신적인 본성을 조금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온갖 미신과 우상들로 바꾸어 버릴 뿐입니다(로마서, Rom 1:25).

로마서, Rom 1:25 NKRV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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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본성을 완전히 아십니다. 당연한 말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인 나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압니까? 완전히 아는 것은 고사하고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철학자들이 고대로부터 끝도 없이 탐구해온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인가?’(What is man?), ‘나는 누구인가?’ 가 아닙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하는 ‘네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슬로건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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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나님은 인생과 달리 완전한 자신의 신성을 완전히 아시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알려주시고 나타내 주실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인 존재로 지어진 우리 인간들 역시 아무리 어린 자녀라고 해도 그 입을 열어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해주지 않으면 부모는 짐작만 할 뿐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신을 합당하게 알고 누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친히 행하시는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친히 말씀합니다(사도행전, Act 17:27),

사도행전 17:27 (NKRV)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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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천지만물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그 속에서도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 인간은하나님의 이런 진리를 억누르고 왜곡할 뿐입니다(로마서, Rom 1:20-24). 하나님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소망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연과 역사, 인간의 본성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물론 옛적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Heb 1:1-3; 로마서, Rom 5:8).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자기를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신 지금은 성령께서 영감하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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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영생은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Jn 17:3).

요한복음, Jn 17:3 NKRV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Jn 1:18 NKRV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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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또 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와 생명입니다(요한복음, Jn 14:6).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자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도 없습니다(디모데후서, 2 Tim 3:15).

디모데후서, 2 Tim 3:15 NKRV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리고 이 지혜는 다름아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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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God’s Existence, 히 11:6) | 모두를 위한 신학(T4All) 002

하나님은 거기 계실 뿐 아니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도자’라는 말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고 어불성설이지만 오늘날 개신교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자기를 찾는 자’는 소위 말해서 ‘구도자’ (seeker) 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찾는 자”는 다른 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기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친히 몸을 찢으사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을 친히 허신 예수께로 나를 이끄사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기를 더욱 더 나타내시고 더 깊은 교제와 교통으로 이끌어가십니다(요한복음, John 14:21).

1. 거기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존재, 혹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누구신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성경을 읽을 수록 분명해 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아니,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들인 모든 피조물과 전혀 다른 분, 전혀 분리된 분으로 계시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전혀 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초월하여 계신 분으로 계시됩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시간과 공간에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하기 전에 ‘미련한 자들’이라고 합니다(시편, Ps 14:1;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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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1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창조자 하나님

부모 없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그를 자기 부모도 부정하는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하기 전에 ‘자신의 존재의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자녀의 존재가 부모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처럼, 성경에 따르면 세상과 우주가 이렇게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들을 창조하신 성경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이사야, Is 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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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26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부모는 자신과 본체적으로 동일한 자녀를 ‘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밖에서(outside himself)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신과 전혀 다르고 전혀 분리된 피조물을 그것도 무에서부터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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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입니까?

3. 계시자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생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완벽하고 능력있는 초인류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능력있는 존재와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온 우주에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르되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친히 자신에 대해 알려주신 바인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제대로 압니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하고, 그런 사실을 사람들의 안팎에서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시편, Ps 19:1; 로마서, Rom 1:18-20; 2:14-16).

시편 19:1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로마서 1:18–20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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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4–16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4. 신자가 믿어야 할 두 가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히브리서, Heb 11:6 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자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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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a. “하나님이 계신 것”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굳게 믿으십시오.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 위에서 그가 누구인지 어떤 하나님인지 배우십시오.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하나님인지 알려주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어떤 분인지, 그가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가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앞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배우십시오. 그것을 믿음으로 그 믿음의 내용에 따라 일상의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계획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있지도 않은 존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것 역시 부질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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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거기 계실 뿐 아니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도자’라는 말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고 어불성설이지만 오늘날 개신교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자기를 찾는 자’는 소위 말해서 ‘구도자’ (seeker) 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찾는 자”는 다른 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기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친히 몸을 찢으사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을 친히 허신 예수께로 나를 이끄사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기를 더욱 더 나타내시고 더 깊은 교제와 교통으로 이끌어가십니다(요한복음, John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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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4:21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상주시는 이’를 영어 성경은 어떤 것에 합당하게 ‘되갚아주는 이’ (reward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갚아주시는 ‘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이 자리한 11장은 이런 믿음의 모범으로 아벨의 믿음을 말합니다, 에녹의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이름도 빛도 없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말합니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게로 나아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자들이었습니다. 약속된 메시야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믿은 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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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키지 않은 죄로 오염된 더러워진 양심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런 자신을 심판으로 ‘되갚는 자’로 알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는 커녕 할 수 있으면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떤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죄에서 구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메시야가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믿고 이제 하나님은 자기에게 상주시는 이일 뿐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상은 다름아닌 삼위 하나님 자신이요 그 영광가운데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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