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빌 1:1) | 빌립보서공부 006

빌립보서 1:1(NKRV)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립보서 1:1후반부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보통 사람들이지만,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가리키는 네 가지 특징들이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빌립보에 사는”, “감독들과 집사들”.

지금부터는 바울이 빌립보서 1:1에서 빌립보서 수신자들에 대해 적시하는 이런 네 가지 사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공부를 도우시고 복주시기를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1. 빌립보서를 받은 수신자들은 “성도들”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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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란 ‘거룩한 무리’ 혹은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모든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구약은 물론이거니와 신약성경에서 신자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롬 1:7; 고전 1:2; 엡 1:1). 로마가톨릭이 이 단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과 달리 성경에 따르면 성도라는 말은 특정한 신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모든 각각의 신자를 지칭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 혹은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구별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명(도구와 그릇)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모양이나 용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양과 크기와 재로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성전에서만 사용되도록,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만 사용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그릇 자체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깃든 것이 아닙니다. 그릇 자체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릇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께만 구별되는도록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용도가 아닌 성전에서만 사용되도록,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만 사용되도록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다’는 제의적인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가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라 사는 ‘구별된 삶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2:1-2)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다’는 제의적인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가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라 사는 ‘구별된 삶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12:1-2)

‘성도’라는 말에 담긴 ‘구별’ 혹은 ‘거룩’의 의미는 신약성경에서 더욱 명확하게 계시되었습니다. 모든 각각의 거듭난 신자가 ‘성도’인 것처럼, ‘성도’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본성적인 삶의 태도, 가치, 모양, 방식, 추구, 관계 등을 벗어버린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구별된 사람혹은 무리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너희가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로새서 3:9, 10).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로 구별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 속함으로 ‘성도’, 즉 하나님을 위한 삶을 위해 구별된 개인 혹은 무리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나에게 속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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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란 하나님께로 구별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 속함으로 ‘성도’,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지어져가는 구별된 무리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빌립보서 의 수신자들을 묘사하는 네 가지 말 가운데 첫번째로 “성도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빌립보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예수의 피로 구별된 무리, 즉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2. 빌립보서를 받은 수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한글성경은 이 대목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모든 성도…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자칫 바울과 디모데가 성도들에게 편지하는 행위를 부연하는 것처럼 잘못 읽힐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대목은 사실은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울이 원래 쓴 인사말의 의미가 더 명확히 전달될 것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처소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처소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또는 in the Lord)라는 말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면서 가장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한 신학자는 바울서신에서 백 번이 넘게 이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중심적인 실체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이 실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무엇을 염두하고 있었을까요?

‘그리스도 안에’(in Christ)라는 표현과 대척점에 있는 바울이 사용하는 말은 ‘아담 안에’(in Adam)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이전에 하나같이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고전 15:22). 첫 사람으로서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한 사람의 개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조상이고 대표였습니다. 그가 한 행위는 아담 개인의 행위였음은 물론 그의 뒤를 이을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곧 내가 아담 안에서, 다시 말해 그가 나의 대표로서 행한 일의 결과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롬 5:12-21).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2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것이 모든 일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사람’인 ‘마지막 아담’이 오셨습니다(고전 15:45, 47). 첫째 사람인 아담이 그 안에 태어난 모든 자연인의 대표라면, 둘째 사람인 이 ‘마지막 아담’(the last Adam)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자의 대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은 다름 아닌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신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곧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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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담’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 그 실패로 초래된 모든 것을 돌이키고 구속하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첫째 아담의 죄와 그 죄로 초래된 모든 죄책을 담당하고 없이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신자들이 물려 받은 아담의 원죄와 그 원죄로 인해 그들이 범한 모든 죄와 형벌을 다 담당하시고 없이 하셨습니다. 심지어 죄의 권세와 사단의 종노릇 하던 것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롬 4:25; 골 2:13-16).

첫째 아담안에 있던 자연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그는 ‘둘째 사람’이요, ‘마지막 아담’인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죄사함과 의로움에 참여합니다. 모든 죄책과 그로 인한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상관없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모든 복락에 참여합니다. 예수를 주로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입니다(에베소서 1:3, 6).

빌립보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구별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구별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3. 빌립보서를 받은 수신자들은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믿어 거듭난 순간부터 이 성도들은 그리스도안에 거합니다. 그들의 영원한 처소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빌립보에 사는’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이땅에 사는 물리적 거처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로서 빌립보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빌립보에 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편지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신자라면 빌립보를 대신해 당신이 사는 곳의 지명을 넣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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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이 특별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지만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하늘의 시민권’을 언급한 것과 빌립보서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빌립보라는 도시가 로마를 본 따 지어졌고, 거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는 특별한 도시임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남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믿음으로 거듭난 신자는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만 산 자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각자 두신 곳에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지금 빌립보서의 수신자들은 ‘빌립보’라는 우상과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이 가득한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신자라면 자신이 자리한 바로 그곳에서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계시된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와 가치와 소망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일상의 생활방식은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자문할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 물어보십시오. 자신의 삶이 하늘나라의 속한 사람임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내는지.

한 개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자문해 보십시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은 말씀을 따라 구별된 삶으로 확인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은 말씀을 따라 구별된 삶으로 확인됩니다.

4. 빌립보서는 하나님이 정한 질서와 권위를 따라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와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집인 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피치 못할 형편이 아닌 한 빌립보 성도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역 교회의 지체로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감독들이라는 말은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 혹은 장로교에서는 ‘장로’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말씀과 기도로 치리하고 양육하도록 성경이 정하는 대로 교회공동체안에서 그 자질과 자격을 검증받고 확인받은 사람들입니다(딤전 3:1-7; 딛 1:5-9). 하지만 기능상 그런 권위를 갖는 것일 뿐 함께 지역교회를 이루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동등한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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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들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교회 공동체의 실용적인 필요를 돌아보는 직분을 가리킵니다(행 6:1-7; 딤전 3:8-13). 교회 공동체의 이런 당면한 실용적인 필요를 돌아보는 것을 한글성경에는 “접대를 일삼는” 것으로 부적당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집사의 직분은 장로가 되기 위한 전 단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의 직분은 장로의 직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이 거할 처소로 지어져 가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정하여 주신 섬김의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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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 수신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 것은 빌립보서 뿐입니다. 이어질 빌립보서의 내용을 보면 이런 독특한 인사말이 허투루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사로서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회에 복음에 합당한 성숙함과 겸비함,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한 하나됨을 권면할 참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지금가지 살펴본 빌립보서 수신자들인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묘사를 통해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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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빌립보에 사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 앞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중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이 빌립보에 교회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무슨 교회 교인이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슨무슨 교회 교인입니까?

이 땅에서 사는 자리는 각자 다르지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 받은 신자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자리합니다. 회심하기 전에 신자들은 하나같이 악한 세상 질서의 일부로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구주와 주로 믿은 그들은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빛의 나라로 옮기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부터 시작해 개인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모든 영원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변화의 현장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삶의 나무가 자라는 비옥한 토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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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사도행전 20:28).

바울 사도가 자신의 서신들에서 이 말을 백 번이 넘게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구원을 얻기 전 우리가 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 이유는 우리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3).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인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던 우리의 상태가 행실과 삶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이전에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외인으로 있을 때,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영적 실체가 눈에 보이는 우리의 삶으로 드러났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드러난 것의 토대가 되는 그런 영적 실체 역시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영적으로 자리한 곳은 어디입니까? 둘째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까? 아니며 첫 사람인 아담 안입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자리한 영적실체가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새 삶, 새 생명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남편이 그것을 인정하고 증거합니까? 당신의 자녀가 그것을 인정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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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를 쓴 동일한 사도가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으사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시는 목적과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성경 말씀처럼, 일상에서 지배적으로 드러나고 보이는 나의 삶은 그 이면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영적실체와 관계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내 일상이라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내 영혼의 현주소는 어디 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 안”이 아닙니까? 구별된 거룩한 삶이 지배적으로 드러납니까? 아니면 스스로 위선적인 삶으로 드러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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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장에 그것으로부터 돌이키십시오. 차에서 전에 없던 이상한 소리가 나면 그 원인을 발견하기까지는 불안해서 운전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차의 중대한 결함을 알리는 전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는 나 자신이든, 동승한 가족이든, 아니면 다른 운전자이든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밤이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이라고 약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십시오. (눅 5:32).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죄에서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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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역 교회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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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중요성과 중심성을 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안에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지금 살게 된 지역에 자리한 지역 교회의 신실한 회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적 전통의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기독교는 다른 신자들과 괴리된 삶을 사는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인 성경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의 회원으로 살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도록 함께 자라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지혜와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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