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감사(빌립보서 1:3-5) | 빌립보서 007

I. 도입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바울서신들은 감사의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 당시 편지의 형식과도 부합합니다. 하지만 바울서신들을 보면 편지를 시작하는 감사의 인사말은 당시 편지의 형식이 그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쓴 감사의 인사말은 어김 없이 편지 전반에 걸친 내용으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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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의 감사는 항상 그 편지의 내용으로 확장됩니다.

빌립보서 1:3-11을 편지의 인사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인사말은 바울이 빌립보서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

  1. 복음 안에서의 일치;

  2.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3. 복음의 진보를 위한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교제;

  4.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에 자라감;

  5. 그리스도인의 기쁨.

오늘은 빌립보서 1:3-11의 이런 인사말 가운데 3절부터 5절까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3–5 (NKRV)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본문에 따라 다음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기도, 감사, 기쁨, 교제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중에 앞의 세 가지인 기도와 감사와 기쁨을 먼저 살펴보고,  ‘교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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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중단 없는 기쁨의 기도와 감사는 빌립보서 전반에 베어있는 주의 복음 안에서 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II. 관찰

A. 기도

특별히 3-4절이 바울의 기도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의 기도가 담고 있는 포괄적인 표현들입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중요한 포괄적 수식어가 담겨 있습니다.

•    3절의 “생각할 때마다”는 말 그대로 내가 너희를 떠올릴 때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    4절의 “간구할 때마다”는 말은 “기도할 때마다” 혹은 “내 모든 기도에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4절의 “너희 무리를 위하여”로 번역된 말은 좀더 명확하게 “너희 모든 무리를 위하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    4절의 “항상”은 말 그대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간구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고,  빌립보 교회의 “모든 무리”를 위해 하는 그의 “모든 기도”에서 “항상”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런 인사말로 시작하는 바울 서신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빌립보 교회와 목사인 사도 바울의 관계는 복음 안에서 특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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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바울의 이 감사의 말에 빌립보 교회에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교회였을거라 생각하거나,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만큼 기쁘고 즐거웠을 거라 섣불리 짐작해서는  안됩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빌 1:15). 바울을 근심하게 하는 문제(빌 4:2)도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15 NKRV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빌립보서 4:2 NKRV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 역시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빌 1:9-11; 2:2, 4, 14, 15; 4:2).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습니다(빌 3:2, 18, 19).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완전한 교회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빌립보 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성도들만은 물론 자기를 힘들게 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모든 무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빌립보 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바울은 항상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좋을 일 때문에 기도할 때 뿐 아니라 근심되는 일을 위해 간구할 때도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빌립보 성도들 안에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바울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처음 세워지는 과정에서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들, 귀신들려 점치던 소녀,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스스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스스로 알아서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행 16장).

그렇게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분이 마침내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반드시 그들 안에서 구원의 일을 성취하실 것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 안에서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는, 그리고 반드시 이루실 구원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너무도 실제적이어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들을 위해 “항상 간구”할 뿐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대와 확신의 근거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 자신의 됨됨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유력함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그렇게 부르시고, 붙드시고, 또 그들을 부른 구원의 선한 역사를 마침내 이루실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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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소망과 기쁨과 기도의 원천은 다름아닌 그들 안에 주권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완전하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이런 바울의 기도는 일회적이거나 간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소식이 들릴 때만 기도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기도할 힘을 잃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시제상으로 볼 때 바울이 기도한다는 말은 계속되는 행위로서의 기도를 가리킵니다. 마치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입는 에봇의 흉배에 항상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있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항상 빌립보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기도한다;는 말은 레위기에서 사용하는 말로 ‘기도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중보의 기도를 말합니다.

그들은 항상 바울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심지어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그들 모두의 영적 안녕과 진보를 향한 바울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의 갇힌 것이 곧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갇힌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사랑하는 양들을 향한, 동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중보의 기도 역시 감옥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쁨과 감사와 기도는 감옥 안이라고 감옥 밖과 달라질 필요가 없었습니다(빌 1:7)

빌립보서 1:7 NKRV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B. 감사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표현함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이 감사는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글어 가도록 하시는 구원의 선한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Phil 1:3)

빌립보서 1:3 NKRV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빌립보서를 쓰기(63 혹은 64 AD) 십 여년 전에 사도 바울은 처음 빌립보 도성을 밟았습니다(AD 52). 제 이차 선교여행 중이었습니다(행 16). 유럽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십 여년 전에 팔레스타인 갈보리 언덕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의 놀라운 역사로 많은 영혼들이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즉시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내 바울 일행은 갓난 아이와 같은 교회를 두고 떠나가야 했고, 그 후로 바울의 마음에는 항상 빌립보 교회와의 사랑의 교제와 애끓는 그리움이 자리했습니다(빌 1:7, 8).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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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빌립보 교회 외에도 많은 교회들이 바울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는 더욱 각별하고 애틋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찢겨지듯 떠난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그들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실 뿐 아니라 그 일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편지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삶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들로 인한 감사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 처지도 그들의 삶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한 감사와 기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빌 1:7)

여기서 우리는 동료 신자들, 혹은 다른 영혼의 형편과 안녕을 위해 올려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봅니다. 특별히 바울이 처한 상황을 보십시오. 감옥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방으로 갇힌 감방처럼 모든 것이 단절되고 가로막힌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환경입니다.  좌절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갇히지 않는 복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이 역사하는 동료 신자들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또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진보가 계속될 것을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Phil 1:3-5).

빌립보서 1:3–5 NKRV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처럼 동료 신자들을 위한 감사의 기도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형편에만 갇혀 있지 않도록 합니다. 오히려 나의 삶의 자리를 넘어서 동료 신자들의 삶의 형편에 주목하도록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기뻐하고 기대하게 합니다(빌 1:9, 11).

빌립보서 1:9 NKRV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서 1:11 NKRV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노상 자기애착과 자기연민으로 치닫는 우리 본성의 시야를 원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구속의 역사와 동료 신자들의 삶으로 옮겨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정작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에 가장 직접적이고 큰 유익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자신의 처지를 언급해서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쓴 편지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C. 기쁨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에는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물론 모든 교회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통함과 연민과 슬픔으로 차오를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다른 신자의 처지와 형편에 온 마음이 기도로  참여하는 것이 때로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 과도 같이 지난하고 기진하는 일일 때가 많기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바울의 마음에는 기쁨의 샘이 터졌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바울의 심령에는 기쁨이 차올랐습니다(빌 4:1) .

빌립보서 4:1 NKRV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더구나 지금 바울이 기도하는 자리는 감옥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이 표현한 이런 기쁨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누린 이런 기쁨은 인간의 본성적인 기질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런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일이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거듭난 심령이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누리는 심오한 즐거움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이런 심령의 즐거움은 땅 속 깊이까지 드리워져 가물때에도 변함없이 솟구치는 관정과도 같습니다. 가물면 바닥을 드러내고 쩍쩍 갈라져버리는 샘과는 다릅니다. 이런 기쁨의 샘은 내가 바라는 좋은 환경에서만 제한적으로 솟구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장과 4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환경과 세상으로부터 얻는 안정감과 즐거움이란 것은 우리 삶이 ‘잘 풀릴 때’만 유효합니다. 그런 즐거움은 환경이 달라지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참된 기쁨은 이 땅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심령에 터진 희락의 샘은 변치 않는 기쁨의 원천인 그리스도라는 반석에 까지 깊이  믿음으로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Phil 4:11) .

빌립보서 4:11 NKRV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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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를 통해 로마의 감옥에 갇힌 바울의 심령에서 지금 빌립보 성도들에게까지 흘러 넘치는 기쁨이 바로 이런 초자연적인 기쁨입니다. 우리가 아다시피 신자가 주 안에서 누리는 이런 ‘기쁨’은 빌립보서 전체의 중심주제입니다.

이전 영상에도 말한 것처럼 ‘기쁨’ 혹은 ‘즐거워하다’는 말이 총 네 장으로 이루어진 빌립보서에만 열두차례나 사용됩니다. 이 단어들이 자리한 문맥까지 포함하면 한 장에 평균 잡아 세 차례 이상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빌립보서 전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양들의 복된 안전을 기뻐합니다. 그 안전을 통해 사랑하는 양들의 삶 구석구석은 물론 온 땅을 내 닫게 될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보와 승리를 확신하고 노래하고 간구합니다(빌 1:6).

빌립보서 1:6 NKRV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III. 적용

1. 기도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선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혹은 환경 의존적입니까? 내 감정이나 상황, 혹은 내가 기도하는 대상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계속되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기도 심지가 마르기 일수 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변치않는 언약의 신실하심만이 성도의 기도의 심지를 성전의 등불과 같이 항상 타오르게 하는 기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1:10 (NKRV)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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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름 아닌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소망과 근거와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둘 때 우리는 바울과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받을 때까지, 찾을 때까지, 열릴 때가지  쉬지 않고 기도할 뿐 아니라 끝까지 바랄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기도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기도 역시 소망을 가지고 심지어 기대와 기쁨으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나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보증이 되시며 친히 기도를 명령하시는 이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지시 않습니까!

2. 감사

내 기도는 나와 내 가족의 육신적인 필요와 이 땅에서의 안녕에만 함몰되어있지는 않습니까? 내 기도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 만을 생각하는 육신의 소욕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불안함과 두려움입니다. 사망입니다(롬 8:6).

야고보 사도가 경고하는 것처럼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정욕은 무슨 부귀영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확보하려는 열망입니다. 그것은 건강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같은 상황에서는 부동산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 교육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필요하고 또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내 삶의 안전과 의미를 부여하고, 하늘의 것들보다 이것들을 더 추구하게 된다면,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 역시 이 땅에서의 안전을 위한 방편으로서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한 모습은 사망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고 구가하느라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말세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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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26–28 (NKRV)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지금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바울의 이런 태도는 기도의 내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우리의 기도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할 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평강을 약속하는 기도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빌립보서 4:6 (NKRV)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은 조건입니다.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이 아니면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참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평강을 위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대신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은 조건입니다.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이 아니면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참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평강을 위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대신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3. 기쁨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주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에 뿌리 박은 기쁨이 기도하는 내 마음에도 차오르고 있습니까? 녹녹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심령에 차올라 넘쳐 흐르는 기쁨을 아십니까? 아니면 모든 영적인 생명력이 소진되어 버릴만큼 기진해버렸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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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이 없습니다. 분산된 마음을 추스리고, 알고 있는 모든 죄와, 양심을 거슬러 행하는 잘못 길들여진 모든 습관으로부터  다시 우리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가 누리는 참 기쁨의 원천과 수여자는 오직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심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은혜의 보좌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를 의지하여 무릎을 꿇을 때 신비롭게도 마른 뼈와 같이 메마른 마음에 생기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갈라진 바닥을 드러낸 샘과 같은 우리 마음은 어느새 차오른 생명수로 기쁨의 샘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되고, 나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넘어서 형제 자매의 형편과 처지를 주 앞으로 실어나르는 깊은 강이 되어 내 삶을 굽이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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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는 이어서 빌립보서 1:5에서 언급되는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간에 중단없이 이루어진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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