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평강’(빌 1:1-2) | 빌립보서 005

빌립보서 1:1–2 (NKRV)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신약성경의 바울의 서신들은 거의가 비슷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려러니 하고 그냥 지나치지가 쉽습니다. 다른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읽을 때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됩니다. 모든 말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영감하셔서 된 것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실제로 바울 자신 역시 한마디도 수신자들에게 허투루 말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말미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당부하는 말을 보면 이런 사실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8–9 (NKRV)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오늘날의 편지나 이메일에도 정형화된 형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사말이 먼저 오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씁니다. 고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 바울 당시 편지의 일반적인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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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편지의 일반적 형식은 오늘날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보내는 사람을 먼저 명시한 것이 다릅니다.

물론 오늘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보내는 사람을 먼저 밝힌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 형식이 그랬습니다. 이를 테면 통상 다음 세 가지 말로 편지가 시작되었습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 받는 사람의 이름, 인사말.

바울의 편지를 이 형식에 따라 확인해 보면 이렇습니다.

보내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의 종들인) 바울과 디모데”

받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

인사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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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1:1-2

2. 보내는 사람

먼저, 보내는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한글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바울과 디모데”(NKRV)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종”은 “종들”을 가리킵니다. 복수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성경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 그리고 그와 함께한 디모데라고 오해될 수 있는 반면, 원래 편지에서는 “종들”이라고 밝힘으로 바울과 디모데 둘 모두가 동등한 그리스도의 종임을 명시합니다.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어지는 시간에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인사말

인사말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인사말입니다. 여기서 인사말은 단순히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형식이 아닙니다. 이 인사말 자체가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을 향해 하나님께 비는 하나의 기도입니다. 물론 이 기도는 편지를 쓰기 위한 형식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바울과 빌립보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빌립보성도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한 염려와 사랑의 발로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 자신의 일상의 기도가 편지지로 옮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 “은혜”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특별히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노에 합당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특별히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노에 합당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바울은 인사말을 통한 이 기도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은혜’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사랑을 받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하지 않은 죄인을 향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성자가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사건에서 계시되었습니다(고후 8:9).

고린도후서 8:9 (NKRV)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b. “평강”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죄인이 누리는 전적인 안전과 안녕입니다.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죄인이 누리는 전적인 안전과 안녕입니다.

‘평강’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구약 히브리어 인사인 ‘샬롬’에 비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하게 됨으로 말미암은 영적이고 육신적인 안녕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1:19–20 (NKRV)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c. ‘은혜와 평강’의 원천

‘은혜와 평강’이 누구로부터 온다고 합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삼위 하나님가운데 제 일위이신 성부 하나님과 제 이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제 삼위이신 성령 하나님이 포함됩니다. 성부가 수여자시고, 성자가 공로자시라면, 성령은 성자안에서 성부가 수여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성자와 연합한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가 신자인 나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복을 가져다 주시고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요한복음 16:14 (NKRV)

14 그(성령)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 인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을 때 할 수 있게 되는 인사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구원 받은 신자가 날마다 구원 받은 자로 살 수 있도록 하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고 죄에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얻는 것이요, 구원 얻은 신자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고 간구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받는 구원의 착한 일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신자가 받은 구원의 착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오실 때까지 지키시고 성취하는 것 역시 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빌립보서 1:6 (NKRV)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건네는 한 줄에 불과한 이 인사말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요하고 심오한 진리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내가 손가락을 살짝 베어 손에 맺힌 피 한방울에 매 순간 내 심장에서 펌프질되어 나오는 내 육신의 에너지와 생명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건네는 한 줄에 불과한 이 인사말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요하고 심오한 진리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건네는 한 줄에 불과한 이 인사말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요하고 심오한 진리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 인사말을 읽는 나에게, 우리에게 성령께서 인사를 건네십니다.

빌립보서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적용

본문의 이런 의미를 토대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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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기는 삶

첫째로, 바울이 자신과 디모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소유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그 누구는 다름 아닌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14:17, 1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위의 로마서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성경 말씀들에서도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께서 믿음 안에서 형제를 섬기는 것이 곧 예수 자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신자의 삶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머리요 주 되신 예수께서 친히 최고의 섬김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섬기라고 우리에게 맡겨두시지 않았습니다.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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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3:4에 친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17). 무슨 세족식 하라고 시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 의식은 단 두 가지, 세례와 성찬 뿐입니다. 그외에 다른 모든 것은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우리의 삶으로 이십사시간 삼백육십오일 우리가 본받아 행해야 것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피부와 살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이런 섬김의 일상 역시 피부와 살처럼 항상 그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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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머리되신 주께서 교회에 명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나는 내 아내와 자녀의 필요를 돌아보는데 민첩합니까? 그런 모습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섬김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로 섬김을 받는 것에 길들여지고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가정에서 일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의 소위 말해서 교회에서 하는 ‘봉사’나 ‘섬김’은 행사나 이벤트는 될 지언정 내 삶에 체화되어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의 섬김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요, 가장 낮은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섬기는 것도 높아지기 위한 섬김이지요. 세상에서는 낮아지는 것도 높아지기 위한 낮아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머리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섬기기 위함입니다. 아내의 머리로, 자녀의 아비로 사는 것은 그렇게 그들을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따라 섬기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피곤하게 일하고 퇴근했더라도 아내의 하루가 어땠는지, 아내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먼저 궁금해 하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필요가 있으면 자신의 필요를 부인하고 아내의 필요를, 자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몸을 움직이십시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 않으신 주를 본받는 이런 자기부인이 일상에서의 작은, 하지만 진정한 섬김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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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은혜와 평강의 삶

두번째로,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빌립보서 1:2). 성부와 성자는 신자가 누리는 은혜와 평강의 원천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1:2에서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을 위해 은혜와 평강을 빌면서 성부와 성자를 무어라 일컫는지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누리며 따르지 않으면, 성자 예수를 ‘주와 메시야’ 즉 절대주권자이신 임금으로 받고 따르지 않으면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은혜와 평강은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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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은 나의 삶에 주 예수의 나의 주 되심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성부께 돌려드린 자녀됨의 모습을 나의 것으로 받아 누리지 않으면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여전히 성경에 무지, 무관심하고, 내 마음의 관심과 가치와 열망과 계획이 자석과 같이 세상과 그 안에 속한 것들(“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고..” 누가복음 17:27, 28)에게로 치닫고, 범사를 내 소견과 뜻대로, 내 필요와 판단대로 행하는 것이 나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평강을 바란다면 그건 정말이지 사막 한 가운데서 냉수를 구하는 격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데도 희한하게 하나님이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것 같습니까? 제가 감히 다른 판단은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원의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성자 예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성자 예수를 나의 유일한 임금으로 내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받아 누리는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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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별된 삶

세번째로, 이런 은혜와 평강을 받아 누리는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구별된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된 뜻인 성경 말씀을 따라 구별된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 편지는 누구에게 하는 편지입니까? “모든 성도”입니다. 주의 피로 구속되고, 주의 뜻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또 더욱 더 힘써 그렇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더욱 많이 힘쓰라” ( 살전 4:1).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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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빌립보서의 인사말 가운데 편지의 발신자를 언급하는 대목과 인사말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맞습니다. 편지를 받는 수신자인 빌립보 교회에 대한 언급은 오늘이 아닌 다음 시간에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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