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이유(Perfecter of Salvation, 빌립보서 1:6-8) | 빌립보서 009

일을 시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끝까지 이루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우리네 속담에도 ‘용두사미’ 혹은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은 그럴듯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 짧은 삶을 돌아보아도 그런 모습이 부지기수입니다. 크게는 제 삶 전체가 그렇고요, 작게는 하루하루, 일 하나하나가 그렇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원인도 많고 이유도 여러가지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끝까지 유익하고 아름답게 이어지는 관계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대가 되고 새로워지는 관계는 지극히 희박합니다. 당신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맺는 관계는 어떻습니까? 상대방은 물론 나 자신 역시 부패한 죄인이요, 끝까지 항상 신실하지 못하는 불의하게 자기 중심적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의 구원의 견고함은 하나님의 존재만큼이나 견고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호색거리로 바꾸려고 합니다.

신자의 구원의 견고함은 하나님의 존재만큼이나 견고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호색거리로 바꾸려고 합니다.

1. 빌립보 성도들의 구원의 견고한 토대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그들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갓 태어난 빌립보 교회를 거만한 제국의 적대적 이교문화 한 가운데 남겨두고 떠난 바울이, 그것도 감옥에 갇혀 스스로는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바울이 이리 가운데 있는 양무리와 같은 빌립보 성도들로 인해 불안하고 조마조마해하기는 커녕 이토록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빌립보 성도들의 신앙과 구원이 바울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고, 바울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바울의 목양아래 있던 교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알았습니다. 자신을 통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을 뿐 저들 안에서 구원의 선한 일을 주권적으로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그 뜻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신앙의 토대는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성도들의 구원과 삶의 토대가 바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은 뛸듯이 기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피눈물나는 시련과 어려움을 지나갈지언정 그들의 구원은 확실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신의 상황이 아무런 방해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뛸듯이 기뻤을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지금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빌립보서 Phi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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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7 (NKRV)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2. 빌립보 성도들의 구원의 시작

복음을 들고 빌립보를 처음 밟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아니, 복음을 들고 우리가 유럽이라 부르는 곳을 처음 밟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계획을 세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원래 아시아로 방향을 틀었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고 급기야 바울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르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이시기에 이릅니다.

a. 빌립보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 분

실제로 사도행전 16:6-10의 기록을 보면 바울일행은 원래 계속해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비롯해 인근의 여러 성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은 계속해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 하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사도행전 Act 16:6)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렀습니다(사도행전 Act 16:7).

· 여기서 바울일행은 오늘날 유럽인 마게도냐 지역이 아닌 그와 정 반대인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냥 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로 가려고 “애썼다”고 합니다(행 16:7). 하지만 이 역시 성령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 때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보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마게도냐의 한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간청하는(implore) 모습이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청하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 이 말은 가장 간절한 요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를 테면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절박하게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기를 간구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마가복음 Mark 7:26).

마가복음 7:26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결국바울 일행은 이것을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결론내리고 드로아로 내려가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에 이릅니다. 바울을 통해 빌립보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맞지만 바울을 강권적으로 그곳으로 이르게 한 분은 다름 아닌 승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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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빌립보에서 영혼들을 부르신 분

그럼 빌립보에서는 어떻습니까? 빌립보 성도들이 스스로 성도가 되었습니까?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자원하여 신자가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구원 역사들 모두(루디아, 귀신들려 점치던 여종,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보면 정작 당사자들은 복음을 들은 것 외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루디아: 바울이 강가로 올줄 알고 루디아가 강가로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강가로 가서 설교했고, 승천하신 주께서 그 설교를 듣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귀신들려 점치던 여종: 이 여인이 귀신이 나간 후에 루디아처럼 믿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이 여인이 믿고 구원 받은 것 역시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 이 간수가 복음을 들으러 바울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섭리가운데 귀신들린 여종을 고친 사건으로 인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감옥에서 바울과 실사의 경건함에 감화되어 복음을 듣고자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갑자기 일어난 큰 지진에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의 생명을 보존하고 복음을 믿도록 하신 분 역시 승천하신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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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변변찮은 시작

과연 빌립보 성도들의 구원의 시작은 오롯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인간적으로 그렇게 전도유망한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와 같은 도시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핵심멤버의 면면치고는 참 보잘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핵심 멤버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본성적으로 우리는 이런 면면을 가진 사람들을 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력한 누군가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면면들이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십니다(로마서 Rom. 4:17).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상황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어떤 형편과 환경도 하찮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소망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 Cor 1:25).

고린도전서 1:26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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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빌립보 성도들의 구원의 성취

a. 사도 바울의 확신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해서 이루어가실 거라 확신합니다(빌립보서 Phil 1:6). 바울은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요? 6절이 힌트를 줍니다.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한 영혼 안에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시작하신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들의 일과 달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는 시작이 곧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인간들과 달리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Luke 14:29-30). 하나님은 이 땅을 사는 자기 백성들이 영원전부터 가지신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그 안에 참여하도록 준비시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신부가 준비되도록 하십니다(요한계시록 Rev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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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루신다’는 말은 시작되고 진행된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완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망대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것과 반대로 기초를 쌓은 망대가 설계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누가복음 Luke 14:29). 그리고 그렇게 준비시키시는 역사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신자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삶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 성경 말씀에 부합하는 삶의 변화가 없는 신자의 삶이란 없습니다(고린도후서 2 Cor 7:1).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어지간히 더딘 자신의 변화에 거룩함과 은혜에 자라가는 것이 지난하고 요원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내 안에서 시작되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신자가 거룩함에 자라가는 것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시간이 가면 저절로 되어있을 거라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 안에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죄인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고 ‘믿음의 주요 그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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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도 바울의 조망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언제를 가리킵니까? 바울이 대망하는 날은 이 날은 언제를 가리킵니까? 금생의 끝인 죽음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닙니다. 심지어 신자가 주와 함께 머물게 될 죽음 이후의 내생도 아닙니다. 그럼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가운데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바울의 주요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 때에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모든 자들이 부활한 몸을 입고 홀연히 주와 같이 화하는 날입니다(고린도전서 1 Cor 15:51).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안에서 택정하시고 때가 되매 각각의 신자들 안에서 시작하신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착한 일”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c. 교인들을 향한 경고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자라지 않는 교인들을 책망하십니다(히브리서 Heb 5:12-13).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이런 자들을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뿐 아니라 믿고 순종함으로 경험하는 삶의 거룩한 변화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로 말미암은 경건한 변화가 삶의 지배적인 모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들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구원의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증거인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지 않는 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디도서 Titus 2:11-12).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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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스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자들이었습니다(히브리서 Heb 4:2). 말씀을 들으나 그 말씀을 믿음으로 자기 삶과 결부시키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부합하지 않게 드러난 불경건에서 돌이키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본성적인 뜻대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저들이 복음 전함을 먼저 받았으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히브리서 Heb 3:6). 나 역시 그런 자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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