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심장으로(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 빌 1:6-8) | 빌립보서 010

1. 바울의 변화

빌립보서 1:6-8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바울의 중심과 그 표현입니다(빌립보서, Phil 1:8).

빌립보서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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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니 이런 사랑과 그 표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대면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뒤틀린 증오로 타오르던 ‘유대교인 사울’의 행적을 기억한다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열망과 그 표현을 예사로 지나칠 수 없습니다(갈라디아서, Gal 1:13-14) .

갈라디아서 1:13–14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제 바울은 말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로 드러납니다. 이전에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황무한 땅과 같았던 메마르고 찌르는 그의 삶의 정원은 의의 태양빛을 흠뻑 머금은 온갖 화초들이 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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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울의 변화의 이유

바울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궂이 ‘은혜’라고 합니까? ‘전혀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 나타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없이 지금 자신에 대한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고린도전서, 1 Cor 15:8-10).

고린도전서 15:8–10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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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함

이런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이토록 사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변화만을 가지고는 설명이 다 되질 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는 바울의 말에서 그 이유를 였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표현을 세 가지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빌립보 성도들 역시 자신과 동일한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을 ‘은혜’라고 하는 끈으로 묶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을 자기 안에서 한 몸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가이없는 사랑을 받은 바울이었기에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신 그리스도께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은 바울의 마땅한 의무를 넘어서 이제 바울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있어서 동일한 은혜로 자기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한 몸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함께 참여하는 놀랍도록 영광스런 일입니다. 신부인 자기 몸된 교회를 향해 풍성히 부어지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심장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특권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운데(사도행전, Act 16) 바울을 통해 세워진 빌립보 교회역시 말 그대로 첫날부터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빌립보서, Phil 1:5). 바울이 감옥에 있든지,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든지,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든지, 바울이 비방가운데 있든지 모든 상황에서 바울과 함께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빌립보서, Phi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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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빌립보 성도들을 인한 감사가 바울의 심중에서 터져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안에 구원의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다고 믿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힌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바울의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차오를 뿐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항상 기쁨으로 간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Phil 1:3-6).

4. 빌립보 성도들의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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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과 동역하는 특권을 누렸던 것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바울과 같은 사람과 동역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21세기 서구사회나 한국사회와 같이 기독교가 제도권의 중심종교가운데 하나로서 정치 세력화되고, 설교에 탁월하고 귀한 내용의 책을 많이 쓰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웬만한 유명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고 많은 특권이 따르는 시대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의 생애는 전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사도로서의 존경과 대접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삶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핍박과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받은 것은 물론, 동료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때로는 오해를 사고 배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동역자들로부터도 저버림을 받고(디모데후서, 2 Tim 4:10) 감옥에 갇히기를 수도 없이 했습니다(고린도후서, 2 Cor 11:21-31). 심지어 여러 성을 다니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틈을 타 사람들의 마음을 사도 바울로부터 돌려 놓으려는 교사들도 있었습니다(빌립보서, Phil 3:2; 고린도후서, 2 Cor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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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빌립보 성도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라는 화려하고 거만한 도시에 심기운, 그 시작 역시 세상적으로는 전혀 변변치 않은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 장에서 바울은 마게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의 가난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극심하게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2 Cor 8:2, 14). 가난할 뿐 아니라 환난의 많은 시련을 지나가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처음 받은 날로부터 바울에게서 빌립보서를 편지를 받는 그 날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바울과 함께 참여하고 헌신했습니다(빌립보서, Phil 1:5; 고린도후서, 2 Cor 8:1-4).

고린도후서 8:1–4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사도 바울의 감사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빌립보 성도들은 과연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바울과 함께 다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었습니다(빌립보서, Phi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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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된 은혜의 연대

이런 빌립보 성도들의 모습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네 모습은 어떻습니까? 복음 안에서 서로를 향한 이와 같은 신실한 헌신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교회마다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고, 선교사들과 개척교회들을 후원한다고 하지만, 온 교우들이 “복음을 변명함과 확장함”에 참여하는 것이기 보다 소위 말해 ‘목회’의 일환이나 ‘교회 사업’의 일환인 ‘그들만의 리그’로 드러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마저도 선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닌 소위 말하는 ‘선교단체’들에 위임된 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주보에 지원하는 많은 미자립교회들과 선교사들의 목록이 매주 인쇄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실제 각각 후원되는 액수들을 보면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개인으로서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멤버인 나는 주보에 인쇄된 선교사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교회에서 기도제목을 따라 혹은 대표기도자를 따라 기도할 때 말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이 선교사들이나 가정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교회에서 돕는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를 위해 힘에 닿는 대로 연보에 힘쓰고 있습니까? 1996년 IMF 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재정난을 이유로 선교사들을 위한 지원을 우선적으로 끊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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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름 대로 이유와 사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쉽지 않은 때를 지나간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비추어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환란중에서도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과 더불어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것을 성경이 기록하여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시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도 같은 은혜에 참여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부정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빌립보 성도들과 사도 바울이 함께 참여한 하나님의 ‘같은 은혜’ 가운데 있다면 그 열매 역시 비슷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시대와 지역과 인종과 문화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연대는 어려움을 통해 더욱 공고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간의 연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바울의 고난에 빌립보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고, 빌립보 교회의 환란과 궁핍함에 바울이 함께 참여함으로 서로를 사모하는 마음과 열망과 감사와 기도는 더더욱 깊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1:8은 이런 사실에 대한 사도바울의 경험에 따른 증거입니다(빌립보서, Phil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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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8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말은 신부된 이 땅의 교회가운데 하나인 빌립보 교회를 향한 애끓는 예수 그리스도의 애간장에 바울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사랑을 빗대어 자신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놀랍지만, 전혀 주저함 없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이런 자신의 열망과 사랑에 대한 증거자로 하나님을 내세우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영감하신 성령께서 바울의 이 말은 참말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 서로 간의 사랑과 연대의 실체를 증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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