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교제(빌립보서 1:5) | 빌립보서 008

I. 도입

이전 시간에 이어 이 시간에는 빌립보서 1:3-5의 말씀에서 특별히 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빌립보서 1:5. Phil 1:5)


빌립보서 1:5. Philippians 1:5 

5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특별히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간에 누린 복음을 위한 일에 함께 참여한 교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이 교제 안에서 바울은 항상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했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으로 간구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그리고 교인들 사이에서 ‘교제’라는 말 만큼 자주 쓰이지만, 또 그만큼 피상적으로 이해되고, 비성경적으로 왜곡된 말도 드물 것입니다. 오늘은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 빌립보서의 인사말을 통해 함께 짚어보고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II. 관찰

A. 교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빌립보에 복음이 들어간 첫날부터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참여하고 있다”는 이 말은 ‘동역하고 있다’ 혹은 ‘동반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인 ‘코이노니아’를 번역한 이 말은 복음 안에서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사이에 이루어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가리킵니다.

1. 바울 사도와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모든 측면에서 함께 힘쓰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를 돕는 빌립보 교회의 재정적인 지원

바울 사역에 대한 관심과 이를 위한 기도

빌립보 교인들 스스로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복음 전파에 힘쓰는 것.

2. 빌립보 도성에 자리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복음 전파를 위해 빌립보 성도들 서로 간에 이루어지는 연합과 일치와 교제.

3. 바울과 동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복음 전파에 힘쓰는 다른 사역자들과 동역해 온 빌립보 교인들의 복음에 대한 헌신.

4.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빌립보 성도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누리는 교제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복을 서로 나누며 다른 성도들과 누리는 교제.

이처럼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간의 성도의 교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복음을 중심으로 질서잡혔고,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헌신되었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풍성하여졌습니다.

B. 첫날부터 이제까지

1.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이 동역이 바울을 통해 빌립보 성에 복음이 전해진 첫날부터 바울이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중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첫날부터’는 바울을 통해 빌립보에 복음이 처음 전해지고 루디아로부터 시작해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 받은 그 날(행 16)을 가리킵니다.

3. 그렇게 시작된 복음을 위한, 복음 안에서의 교제가 바울이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 중단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C. 이 교제의 특징

바울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린 이 교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1. 복음중심의 교제

이들의 교제의 시작과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첫날부터’는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첫날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이들의 복음을 위한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복음을 통해, 복음을 위해 시작된 교제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힘써 싸웠습니다(빌립보서 1:27. Phil 1:27).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일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빌립보서 1:29. Phil 1:29). 뿐만 아닙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에 기도는 물론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함께 참여하고자 했습니다(빌립보서 1:19. Phil 1:19).

그리스도는 개개인의 신자를 복음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릴 수록 각각의 신자들은 동시에 서로에게로 가까이 이끌립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중심으로 누리는 교제가 그렇습니다(에베소서 2:20, 22. Eph 2:20, 22).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은 항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그의 지체들을 향한 헌신을 내포합니다(히브리서 11:25-26. Heb 11:25-26).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지체들을 향한 헌신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연장입니다(요일 4:20. 1 Jn 4:20). 형제들을 사랑하고 돌아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돌아보는 것입니다(마 25:34-40. Matt 25:34-40).


요한일서 4:20. 1 John 4:20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 신실한 교제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간의 교제는 그 실체에 있어서는 복음 중심적이고, 그 성격에 있어서는 전인적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마게도니아 성도들이 모아놓은 연보를 언급하면서도 사도 바울은 ‘교제’라는 말을 수 차례 사용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교제는 영적일 뿐 아니라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도와 염려는 물론 필요할 때는 재정적인 도움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띠는데, 여기서도 ‘코이노니아’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롬 15:26. Rom 15:26).


롬 15:26. Romans 15:26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교제’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함께 모여서 시간을 갖는 것, 함께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것 등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교제의 한 측면입니다. 심지어 소위 말해 ‘교제의 시간’이라는 것을 따로 정해놓고 그에 따른 프로그램과 전문적인 진행자들이 고용되는 것을 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그만큼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피상적’이고, 인위적이고,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교제는 전인적인 교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제로 인해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정과 자원을 들이는 것은 물론 공동체 중 하나를 바울에게 보내 재정적인 바울의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바울의 실제적인 삶의 필요도 채우도록 합니다(Phil 4:14; 2:25). 그렇게 복음의 진보를 위해 힘쓰는 바울을 격려하고 그와 함께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4. Philippians 4:14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서 2:25. Philippians 2:25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감옥에 갇혀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사랑하는 형제 에바브로디도의 얼굴을 대면하게 된 바울의 기쁨과 감사가 어땠을까요? 에바드로디도를 통해 그리도 그리워하던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소식과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기도에 대해서 듣는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형제를 위한 기도와 염려는 물론 우리의 지갑을 열어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신자의 교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지체를 위해 돈을 들이고 사람을 보내서 위로하고 필요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요,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보와 성도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 가장 의미있는 투자입니다. 도둑이 들 수 없고, 좀과 동록이 해하지 않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입니다(Matt 6:19).


마태복음 6:19. Matthew 6:19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3. 중단 없는 교제

“첫날부터 이제까지”(1:5)라는 바울의 말서 보듯 빌립보 성도들과 사도 바울의 복음안에서의 교제는 중단없이 이어지는 교제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한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은 그들의 주님을 닮은 한결같고 신실한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15의 바울의 언급을 보면 교회들 중에는 여러 이유로 중간에 끊어진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빌립보 교회만 남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빌 4:15. Phil 4:15).


빌립보서 4:15. Philippians 4:15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교회인 빌립보 교회는 이 때까지 한 결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안에서 교제하고 그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외부로부터의 핍박과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성도들은 힘 닿는 대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럴 수 없는 형편에 있더라도 그들의 마음만큼은 항상 복음의 진보를 위한 일에 벌써 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빌 4:10. Phil 4:10).


빌립보서 4:10. Philippians 4:10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III. 적용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더이상 나 자신의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를 통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동료 신자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승리의 역사와 복음의 새로운 실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 개인의 내면 지향적이고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지역교회에 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죄인이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속으로, 하나님의 집 식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둔 형제들 가운데 속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그렇기 때문에 ‘독불장군’식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성도들과 단절되고 분리된 그리스도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거듭난 신자들의 모습은 지역교회의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3. 복음 안에서의 교제의 중심성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실체요, 그 모양과 성격입니다. 거듭난 하나님 집안 사람들의 본성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는 전인적이고, 총체적이고, 지속적입니다. 무엇보다 복음 중심적입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입니다.

4. 영원한 교제

무엇보다 이 교제는 영원한 교제입니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영원전부터 시작된 교제요 영원까지 이르는 교제입니다. 인간 관계의 가장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육신의 가족이 누리는 교제보다도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누려집니다. 무엇보다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육신의 가족과의 교제는 함께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 사람들로 드러나지 않는 한 순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리고 본성적일 따름입니다.

5. 물음들

나는 어떤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까? 내가 신자라면 내가 동료 신자들과 누리는 교제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교제를 반영하고 있습니까? 내가 누리는 교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내 믿음을 장식하는 교제입니까? 복음으로 시작된 교제답게 복음안에서 누려지고 있습니까? 나, 내 가족, 내 공동체안에서는 물론 하나님이 나를 두신 자리에서 복음의 진보로 결실하고 있습니까? 신자로서 나의 교제는 여전히 본성적이고 육신적인 가족과의 교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6. 이 교제로의 초청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의 외인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전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든지 예수를 믿는 순간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 영원한 생명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영원까지 이르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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