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 | 누구나, 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기쁨 | 빌립보서 129

이 기쁨은 예수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지 않는 영혼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자는 누릴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주를 향하여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영혼은 누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NKRV)

 

1. “나의 형제들아”

‌빌립보서 3:1은 “끝으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제 편지의 중반을 지나고 있는데 ‘끝으로’라고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의 ‘끝으로’는 나중에 빌립보서 4:8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으로”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 말은 바울이 이제 빌립보서를 끝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편지의 중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단어는 ‘더욱이’, ‘지금부터는’, 혹은 ‘그렇기 때문에’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번역되는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편지의 흐름이나 분량에도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다음 주제로 넘어갈 것을 암시합니다. 이제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빌립보서 3:1에서 바울은 “나의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다시금 수신자들을 부를 때는 편지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어떤 전환을 이룰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여기서 “나의 형제들”은 빌립보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형제되고 하나님의 한 자녀된 성도들입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처음 전해지던 날부터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와 교회를 세우는 데 힘썼던 동역자들입니다.


‌2. 초자연적인 기쁨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1절에서 바울이 명령하는 이 기쁨은 오직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하는 기쁨입니다.

‌어제 포스트에서 설명한 이 기쁨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초자연적인 출생을 가진 영혼만이 누리는 초자연적인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일이 ‘잘 풀릴 때’ 행복하다고 느끼고 많은 것을 누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자연적인 기쁨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이런 자연인들이 누리는 기쁨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삶의 주변과 환경에 기대어 널뛰기를 하는 일시적이고 의존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예수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지 않는 영혼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자는 누릴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주께로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영혼은 누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NKRV)

‌이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 그것도 주의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 주를 섬기는 신자들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한복음 12:26, NKRV).

‌이 기쁨은 그렇게 성자 예수를 섬기는 자들을 귀히 여기시는 성부 하나님의 기쁨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판에 울리는 것입니다.


‌3.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기쁨

‌아무리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의 복음을 의지하여 주의 길로 돌이킨다면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무슨 기술이 아닙니다. 경력이 아닙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라야 능숙하게 맛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초자연적인 기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이 기쁨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에 대한 하늘의 기쁨이 실시간으로 성령안에서 그 신자 안에서 누려지는 기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기쁨은 영적 지도자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쁨은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한 것에 따라 능숙하게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이전까지 어떻게 지내왔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고 하는 것들은 이 기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고, 더 경건하고, 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한다면 이 기쁨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믿음의 삶의 결과로서 지금 더더욱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하며 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기쁨은 인간적인 조건과 상관이 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쁨은 구원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쁨의 원천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 그대로 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인격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비를 거스려 살아가는데 그것을 기뻐할 아비가 어디 있습니까? 자녀가 아비의 마음을 알아 그 뜻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데 기쁘지 않을 아비가 어디있습니까?

‌아비와 자식간의 관계는 여전하지만 실시간으로 누려지는 이 관계는 두 인격체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의 기쁨의 현재적인 역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 (로마서 16:19, NKRV).‌‌‌‌‌

 
Previous
Previous

빌립보서 3:1 |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위한 하늘의 처방 | 빌립보서 공부 #130

Next
Next

바울의 매임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빌립보서 1:13-14) | 빌립보서 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