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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인도(사무엘하 7:3; 이사야 53:10, 11) | Discerning Lord’s Leading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셨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라든지, 혹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소위 말해서 성경과 같은 무오하고 충분한 “계시”가 있는 때도 아니고, 구약성경에서와 같은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성경 말씀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경 말씀을 그 의도대로 바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2.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계시되고 바로 이해한 성경 말씀이나 그 말씀에서 비롯된 원리를 바로 적용하는 경우입니다.

  3. 그리고 그렇게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행한 결과 어떤 일로 드러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거룩한 열망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에 보인 다윗의 태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런 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그의 후손인 예수의 삶을 통해 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과 성취는 예수의 수고의 씨로 드러날 오고오는 세대의 지배적인 특징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와 바람에 '예’는 물론 ‘아니요’로도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이나 느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항상 자신의 상황을 비추어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짓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다윗의 선한 열망에 나단 선지자가 사무엘하 7:3(2 Sam 7:3)의 말씀과 같이 대답했지만,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그것과 다른 당신의 뜻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사무엘하, 2 Sam 7: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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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것은 3절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한 나단 선지자의 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NO’에 대한 다윗의 기꺼운 순종과 찬가에서 드러납니다. 목이 메이도록 가슴벅찬 다윗의 사랑에 찬 대답을 들어보십시오(사무엘하, 2 Sam 7:18-22),

사무엘하 7:18–22 (NKRV) —

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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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셨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라든지, 혹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소위 말해서 성경과 같은 무오하고 충분한 “계시”가 있는 때도 아니고, 구약성경에서와 같은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성경 말씀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경 말씀을 그 의도대로 바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2.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계시되고 바로 이해한 성경 말씀이나 그 말씀에서 비롯된 원리를 바로 적용하는 경우입니다.

  3. 그리고 그렇게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행한 결과 어떤 일로 드러난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다른 상황에서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신명기, Deut 29:29),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뜻이면 ......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고 말해야 합니다(야고보서, James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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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15 (NKRV)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진실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전 짓기를 열망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진정성과 상관없이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거룩한 열망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NO’는 다윗에 대한 거부나 거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해할 수 없지만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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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에 보인 다윗의 태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런 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그의 후손인 예수의 삶을 통해 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과 성취는 예수의 수고의 씨로 드러날 오고오는 세대의 지배적인 특징이 됩니다(이사야, Is 53:10,11).

이사야 53:10–11 (NKRV)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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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하나님의 법(Believers & The Law of God) 01 | 시편 119:103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은 선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복음과 율법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끄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몰아가고,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계시인 율법의 의로움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내달리게 하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명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빛이 없이 흑암가운데 있는 이 땅을 지나갈 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그 발의 등이요 그 길의 빛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이런 하나님의 법이 없이 우리는 흑암 속을 더듬으며 넘어지고 자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법을 통해 빛 가운데 행할 뿐 아니라 이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아가고 누리고 그를 닮아갑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아는 일에 계속해서 자라갑니다(야고보서 James 1: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힘써 구하고 배우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우리로 이 놀라운 복을 누리도록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삼위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골로새서 Col. 1:13). 

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세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의와 생명과 평안”의 법인 성경 말씀이 홀대 받는 시대입니다. 불경이 불교의 경전들이고, 코란이 이슬람의 경전이고, 바가바드 기타가 힌두교의 경전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 정도로 여깁니다. 이런 인식이 갖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다른 종교경전들과 같이 죽은 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living, 히브리서 Heb. 4:12)고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관지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믿음으로 삶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히브리서 Heb.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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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의 예배에 가면서 성경대신 코란을 들고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따라 사는 것은 의식조차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머리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실제로는 성경 이외의 모든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을 구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삶의 패턴이 희미해진지 오래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 풍조(standards)를 따르지 말고 오히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이 사회의 가치와 세계관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 불안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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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하나님을 떠난 세대의 특징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전반적이고 지배적인 모양이 될 때마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이런 특징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변의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거민들의 풍습과 가치와 삶의 방식을 모방하고 그들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법을 변개하고 세상의 풍습과 가치를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에 맞추는 왜곡과 정당화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번거롭기 짝이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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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패턴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실제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이 지속될 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더욱 더 손상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있는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C. 성경이 말하는 성경에 대한 합당한 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얼마나 상반되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는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얼마나 상반되는지요?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 교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직접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비교해 보시죠. 

1. 다윗의 예

시편 119편만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잘 드러낸 대목도 없습니다. 케빈 디영(Kevin DeYoung)은 자신의 책 Taking God at His Word에서 시편 119편을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노래를 넘어서 다윗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연애시(love poem)라고 불렀습니다(Taking God At His Word, pp. 11-15). 

a.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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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다윗의 순전한 기쁨이었습니다. 단순히 성경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다윗의 즐거움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하나님 그 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은 곧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었습니다,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47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74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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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하나님의 법을 사랑함

다윗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이 그 자체로 경이로웠기 때문이며 이런 율법을 그가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계명에 대한 사랑이 연이어 나옵니다,

48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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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하나님의 법을 열망함

사랑하는 이를 열망하듯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열망했습니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40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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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하나님의 법을 의지함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우리가 익숙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변의 태도와 너무나 이질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경이로움에 놀라고 이 말씀을 사모하고 의지합니까? 너무나 낯선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2. 바울의 예

구약시대라서 그런 것일까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신약시대에는 '율법'이 아닌 '복음'에 집중해야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까지 느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신약성경을 한 번 봅시다. 구약의 다윗에 견줄만큼 신약성경을 많이 기록한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로마서 7:6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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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복음으로 더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6절). 하지만 자세히 그의 서신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울의 마음은 다윗만큼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시대에도 율법은 구약시대만큼이나 여전히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그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으로 새롭게 된 자신의 존재의 중심('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3. 교회 역사에서의 예

성경의 계시가 종결된 지금은 다르다고요? 사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가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어두운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군데군데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도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있었습니다. 인위적이고 피상적인 부흥이 아닌 참된 부흥의 때마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시대, 지리, 인종, 문화, 언어를 초월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이라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다름아닌 앞에서 예로든 다윗과 바울이 보여준 태도, 하나님의 법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이끌리는 사랑과 열망으로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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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부흥의 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각 부흥의 끝자락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하나님의 계명과 법에 대한 태도가 무엇입니까? 메마른 율법주의로의 전락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또 다른 극단으로서의 반율법주의의 득세입니다. 이 두 태도 모두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지배적인 특징이 그렇지 않습니까? 

D.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오해와 바른 이해

1. 오해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는 오해가 다분합니다.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원수와 거짓 교사들이 뿌려놓은 독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의 본성이 환영하는 속임입니다. 복음이 거듭난 신자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와 그 영향입니다. 

2. 바른 이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은 선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복음과 율법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끄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몰아가고,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계시인 율법의 의로움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내달리게 하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명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빛이 없이 흑암가운데 있는 이 땅을 지나갈 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그 발의 등이요 그 길의 빛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이런 하나님의 법이 없이 우리는 흑암 속을 더듬으며 넘어지고 자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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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법을 통해 빛 가운데 행할 뿐 아니라 이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아가고 누리고 그를 닮아갑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아는 일에 계속해서 자라갑니다(야고보서 James 1: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힘써 구하고 배우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우리로 이 놀라운 복을 누리도록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삼위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골로새서 Col.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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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 | 예레미야 29:4-7

It all begins with an idea.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9:4-7)

하나님은 모든 새로운 시작의 원천이고 주재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그것도 온 세상에 드리운 모든 타락과 부패의 원흉인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이란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합니까?

엄밀히 말하면 인간에게, '자연'에 '새로운 시작'이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건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부패와 죄책으로 오염된 세상에 과거와 절연된, 죄의 영향과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시작이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이신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새 시작을 주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으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창조입니다.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는 말씀만 발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새창조를 위해서는 독생자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았어야 했습니다. 영적인 새창조, 모든 진정한 새 시작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그의 피가 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런 진정한 새시작, 새창조를 사는 새로운 피조물인 신자는 날마다 그를 힘입어 새로운 시작의 삶, 회개의 연속인 삶을 삽니다.

과연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요 13:10). 하나님은 과연 모든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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