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 meditations Timothy Jang 성경묵상, meditations Timothy Jang

고난, 그리고 고난자(Suffering & the Sufferer) | 로마서 2:4-6

"고난 당하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 역시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료 인간들과 같이 삶에서 초래되는 모든 정치, 사회, 물리적 어려움(질병, 사고, 고통 등) 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더이상 아담 안에서 정죄 된 죄책과 저주 아래 있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을 받고, 죄를 죄로 알아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본성적인 애착으로부터 젖을 떼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닮는 일에 더욱 자라간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런 실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이 실체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런 신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 안팎에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역사가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 역시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료 인간들과 같이 삶에서 초래되는 모든 정치, 사회, 물리적 어려움(질병, 사고, 고통 등) 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더이상 아담 안에서 정죄 된 죄책과 저주 아래 있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을 받고, 죄를 죄로 알아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본성적인 애착으로부터 젖을 떼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닮는 일에 더욱 자라간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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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런 실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이 실체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런 신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 안팎에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역사가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땅을 사는 모든 개인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더해갈수록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각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속했는지, 그 속에 자리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자기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여실히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늑대와 개, 오리와 백조가 새끼일 때는 잘 분간이 안되다가 점점 자라면서 그 모양뿐 아니라 그 본능과 성질이 확연히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듭나 둘째 아담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닮은 경건(god-likeness)으로, 여전히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연인들은 자신들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회개치 않는 본성적인 마음과 완악함을 따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상관없이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따라 삽니다.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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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인생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선’(good)과 ‘악’(evil)이라는 두 가지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도덕적인 의미의 ‘선’과 ‘악’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듣는 말마따나 인생이 겪는 ‘행’과 ‘불행’이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쉽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악’이라고 할 때는 고통과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선’ 역시 마찬가지로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상황이나 일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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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온갖 재앙과 비참함 가운데 이루어지는 욥의 탄식을 보면 ‘악’이 뜻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Job 30:26).

욥기 30:26

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선’은 시편 133기자가 하나님 백성의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흡족해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나 상황을 가리킵니다(Ps 133:1).

시편 133:1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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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선하신 분입니다. “선인”에게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그 해를 동일하게 비추십니다. “의로운 자”에게 뿐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 주십니다(Matt 5:45).

마태복음 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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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런 선하심을 깨닫고 불경건한 삶을 떠나 경건한 삶으로 돌이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사는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날을 위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해갑니다(Rom. 2:4-6).

로마서 2:4-6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지만 개인적으로든 전 우주적으로든 마지막 심판날이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오래 참으심으로 예수 안에서 믿음과 순종의 길로 돌이키라고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십니다(Luke 5:32).

Luke 5:32 NKRV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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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와 연단의 필연성

하나님은 징계와 연단으로 자기 자녀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Prov 6:23).

잠언 6:23 

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은 또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는 분이십니다(Heb 12:6).

히브리서 12:6 NKRV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장차 자녀들이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누리도록 일생동안 징계와 연단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들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래서 불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멸망과 악을 맞닥뜨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이 세상에 속한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불경건한 자들이라고 사철의 좋은 날씨와 먹거리, 건강, 가정,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을 못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자들이라고 해서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일들은 물론 애매한 핍박까지 덤으로 받습니다. 심지어 불경건한 자들의 손에 무자비하게 도륙되는 악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녀를 먼저 자신의 품에 묻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경건한 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선’과 ‘악’, ‘행’과 ‘불행’은 그 것 자체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결정적인 근거는 아닙니다. 좋은 일들이 계속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더 받고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일이 계속해서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원치 않는 일들이 터지거나 하는 일들마다 예기치 않게 어그러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아래 있다거나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악인에게도 선을 베푸시고 경건한 자라 할지라도 징계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가지고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반드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성경을 통해 분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사무엘상 1 Sam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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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에 대한 좋은 예가 사무엘 상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 왕이 엔게디 광야에 다윗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숨어있는 굴로 다윗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울왕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면 더이상 도망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절제절명의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기도에 응답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그의 부하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라고 까지 했습니다. 사울 왕을 다윗의 손에 붙이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하나님이 기름 부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에게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맞설 때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했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의 뒤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삼상 24:10),

사무엘상 24:10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이처럼 우리 삶을 일구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지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 곧 자기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선한’일 이든 원치 않는 ‘악한’ 일이든, ‘번영’이든 ‘역경’이든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거듭난 경건한 신자가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이 일반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번영’이든 ‘역경’이든 주의 뜻 안에서 받으면 매 한 가지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신자가 누리는 참 자유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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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태도는 믿는자의 태도가 아니라 믿음을 빙자한 방종입니다. 그렇다면 ‘번영’이나 ‘역경’의 섭리를 마주한 신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시기를 바라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번영’이든 ‘역경’이든 내가,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맞닥뜨린 일들을 진리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이 되도록 선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의 차이

경건한 신자들은 잠시 ‘역경’을 맞닥뜨렸다고 해서 침륜에 빠지거나 자포하기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 풍조와 자신의 본성을 따라 대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잠시 ‘좋은’ 일들이 계속되고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높아지거나 자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에 이끌립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입술의 말은 청산유수로 달라질 지언정 그 속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땅에서 구가하는 안락한 삶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땅의 번영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이기에 혹여나 예기치 않은 불행이나 ‘역경’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그것을 자신을 향한 심판으로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이 길들여지고 애지중지하는 안락함과 안정감이 깨어지는 것을 더 못견뎌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마음은 요동하는 파도와 같이 정함이 없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곧 미친 바다와 같이 요동하는 정함이 없는 세상에 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닻을 드리우지 않아 풍랑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배와 같이 어쩔줄을 모릅니다(Is 57:20).

이사야 57:20 

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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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주어지는 ‘역경’과 ‘번영’으로 인한 가장 큰 차이는 이 일들을 지나가는 주체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역경’은 ‘역경’대로, ‘번영’은 ‘번영’대로 그것들을 지나가는 주체들에게서 하나님이 섭리가운데 그런 일들과 환경을 보내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일들을 맞닥뜨리고 지나가는 각각의 주체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느냐의 여부에 따라 ‘역경’과 ‘번영’이 그 영혼에 이루는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자와 불경건한 자가 일생토록 공히 하나님의 섭리를 살아가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영원의 간극만큼이나 다릅니다(Phil 1:27, 28)

빌립보서 1:27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어거스틴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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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이런 사실을 적실한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불이라도 금은 그 속이라도 맹렬히 빛을 발하지만 겨는 연기를 낼 뿐이다. 같은 도리깨질이라도 알곡은 겨와 분리되어 알곡으로 드러나는 반면, 볏짚은 부러지기만 할 뿐이다. 같은 압착기 아래서 기름은 결코 찌끼와 섞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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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입니까? 선한 자에게는 모든 일이 선하게, 악한 자에게는 모든 일이 악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가 처한 환경이 아닌 자신이 누구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같은 섭리아래 있더라도, 같은 고난을 지나가더라도 거듭난 경건한 신자는 이로 인해 더욱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고 더욱 더 주와 교제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반면, 불경건한 자는 이로 인해 더욱 더 완고하게 되고 주와 멀어지고 상관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불경한 행실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경건한 신자는 하나님을 더 간절히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Matt 12:35).

마태복음 12:35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여기서 “그 쌓은 선”, “그 쌓은 악”이라는 표현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가득채우고 있는 것, 그 사람이 보화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고난과 역경을 지나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역경의 섭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주가 함께 하겠지가 아니라 실제로 순간순간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그와 교통하고 동행햐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그 고난과 역경을 지나가는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Matt 12:33).

마태복음 12:33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나는 좋은 나무입니까? 좋은 나무에서만 열릴 수 있는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어거스틴의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한번만 저어도 오물은 악취를 내지만, 향료는 저을수록 사방에 달콤한 향기를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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