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 | 예레미야 29:4-7
It all begins with an idea.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9:4-7)
하나님은 모든 새로운 시작의 원천이고 주재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그것도 온 세상에 드리운 모든 타락과 부패의 원흉인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이란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합니까?
엄밀히 말하면 인간에게, '자연'에 '새로운 시작'이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건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부패와 죄책으로 오염된 세상에 과거와 절연된, 죄의 영향과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시작이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이신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새 시작을 주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으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창조입니다.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는 말씀만 발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새창조를 위해서는 독생자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았어야 했습니다. 영적인 새창조, 모든 진정한 새 시작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그의 피가 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런 진정한 새시작, 새창조를 사는 새로운 피조물인 신자는 날마다 그를 힘입어 새로운 시작의 삶, 회개의 연속인 삶을 삽니다.
과연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요 13:10). 하나님은 과연 모든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Soli Deo Gloria
성경묵상 리스트
인류 역사상 지금과 같이 의학기술이 발전을 이루고 의료 시스템이 다수에게 전방위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런 혁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전염병의 위협아래 놓인 적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은 유례없고 비상한 때를 신자인 나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습니까? 성경과 성경의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나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때에 어떻게 발휘되고 있습니까? 나의 생각과 마음은 과연 내가 믿는 성경의 계시를 따라 작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와 같이(마 22:29; 막 12:24, NKRV) 육체와 시대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자와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자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어디에 속했다고 합니까?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중직자로 살고 설교자로 목사로 살고 교회를 개척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은 선하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표지는 아닙니다.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재앙가운데 몇 가지를 흉내낸 것과 같이 필요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이 흉내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영혼에 심으시는 영생하기까지 자라가는 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이 경외함 때문에 자신의 언행심사를 삼가할 정도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 앞에서 두려워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까? 이 경외함은 당신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납니까? 당신의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직장 동료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인정합니까?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합니까? (시편, Ps 2:11)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지나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1 Pet 1:17)
칭의와 성화에 대한 혼동과 오해와 왜곡은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교회가 자리한 사회에 많은 치명적인 비극과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이로 인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이로 인해 신자라고 일컫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가운데 죄에 종노릇하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구원을 위한 방편이나 도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계명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물론 구약의 가르침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와 의무로 자리할 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공로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순종을 칭의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위한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 혹은 거룩이요, 이것은 곧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셨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라든지, 혹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소위 말해서 성경과 같은 무오하고 충분한 “계시”가 있는 때도 아니고, 구약성경에서와 같은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하거나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경 말씀을 그 의도대로 바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계시되고 바로 이해한 성경 말씀이나 그 말씀에서 비롯된 원리를 바로 적용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행한 결과 어떤 일로 드러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거룩한 열망에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에 보인 다윗의 태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런 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그의 후손인 예수의 삶을 통해 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순종과 성취는 예수의 수고의 씨로 드러날 오고오는 세대의 지배적인 특징이 됩니다.
산상수훈으로 시작하는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된 설교(누가복음 Lk 6:20-47) 말미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노라고 나선 제자들을 도전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누가복음 Lk 6:46).
Luke 6:46 NKRV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은 그 바로 앞의 ‘나무와 그 열매’ 유비(누가복음, Lk 6:43-46)와 ‘반석 위에 지은 집’ 유비(누가복음,Lk 6:47-49) 사이에 경첩과 같이 자리합니다. 이 이야기 모두 선한 열매, 즉 고백에 부합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백의 진위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와 고백에 부합하는 순종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 6:47이 자리한 6장의 전체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부르는 것에 부합하게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본훼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이라는 책에서 ‘언제든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부르시는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과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원하는 순종으로의 자유입니다. 당연히 ‘죄와 불순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 고백과 짝을 이루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건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따라 구별된 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천국에 위선자를 위한 자리가 없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입술만의 고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은 선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복음과 율법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끄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음으로 몰아가고,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계시인 율법의 의로움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내달리게 하는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명은 구원 받은 신자들이 빛이 없이 흑암가운데 있는 이 땅을 지나갈 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그 발의 등이요 그 길의 빛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이런 하나님의 법이 없이 우리는 흑암 속을 더듬으며 넘어지고 자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법을 통해 빛 가운데 행할 뿐 아니라 이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아가고 누리고 그를 닮아갑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기뻐보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아는 일에 계속해서 자라갑니다(야고보서 James 1: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신자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힘써 구하고 배우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우리로 이 놀라운 복을 누리도록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삼위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골로새서 Col. 1:13).
"고난 당하는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 역시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료 인간들과 같이 삶에서 초래되는 모든 정치, 사회, 물리적 어려움(질병, 사고, 고통 등) 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더이상 아담 안에서 정죄 된 죄책과 저주 아래 있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을 받고, 죄를 죄로 알아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세상을 향해 이끌리는 본성적인 애착으로부터 젖을 떼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닮는 일에 더욱 자라간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런 실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이 실체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런 신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 안팎에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역사가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여느 인생과 같이 슬픔과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경험합니다. 인간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한 동료 인간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원인 모를 다른 무엇으로 인한 것이든 그렇습니다.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사망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고 또 구원에 이를 지언정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고 거듭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중요하고 결정적이고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지나가는 이런 온갖 경험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들의 유익이 되도록 선용하시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 자녀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더이상 심판이나 저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참 신자들은 이런 모든 것들을 감사와 소망가운데 받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5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겪는 이런 모든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경히 여기지도 말고 또 이로 인해 낙심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첫째로 이런 모든 일들은 신자들에게 재앙이나 심판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연단하고 훈육하시는 방편이고, 둘째로, 하나님이 자녀를 그렇게 징계하고 훈육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단련하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섬기도록 그들을 구비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듭난 신자의 삶에서 겪는 고통과 고난은 자녀를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고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눈을 열어 멸망받을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세상에서 젖을 떼도록 하고, 빛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길을 깨닫게 하고, 주의 선하심과 지혜와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그것을 더욱 더 사모하도록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와 연단의 방편일 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소위 말하는 눈먼 ‘재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Rom 8:1).
신자는 ‘그리스도의 학교’라 불리는 삶의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모든 온유와 겸손의 원천이신 주 예수께서 부르십니다. 자기와 함께 멍에를 메고 직접 자기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그 멍에는 쉽고 그 분이 부르신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그 분이 주신 계명을 따라 행하십시오(1 Jn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Matt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