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오직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서 1:27).
‘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빌 1:1) | 빌립보서공부 006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믿음으로 거듭난 신자는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만 산 자들입니다.
로마서 14:7–8 (NKRV)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하나님께서 각자 두신 곳에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빌립보서의 수신자들은 ‘빌립보’라는 우상과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이 가득한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은혜와 평강’(빌 1:1-2) | 빌립보서 005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건네는 한 줄에 불과한 이 인사말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요하고 심오한 진리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살짝 베인 손가락에 맺힌 피 한방울에 매 순간 내 심장에서 펌프질되어 나오는 내 육신의 에너지와 생명이 고스란히 담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소개(A Brief Intro) | 빌립보서 001
‘21 세기의 빌립보’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편지
마게도냐의 첫성 빌립보(Philippi) | 빌립보서 002
빌립보는 지금 우리네 사회와 영적으로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빌립보교회 | 빌립보서 003
“만약 신약성경에 빌립보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빌립보서 (Summary)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따르지 않고 건강하기를 기대할 수 없듯, 신자가 그리스도께서 이르신 말씀을 거스르면서 기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라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라야 기쁨을 누립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1, NKRV)
예수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지 않는 영혼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자는 누릴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주를 향하여 돌이키기를 거부하는 영혼은 누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NKRV)
이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 그것도 주의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 주를 섬기는 신자들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한복음 12:26, NKRV).
이 기쁨은 그렇게 성자 예수를 섬기는 자들을 귀히 여기시는 성부 하나님의 기쁨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판에 울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갇힌 바된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그런 바울을 모범으로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증거와 모범을 통해 주의 복음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새롭게 눈 뜨게 될 뿐 아니라 더욱 더 용감하게 그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단순히 한 지역의 거점 도시가 아닌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제국의 중심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서도 가장 중심인 궁정 시위대 안의 모든 사람들과 그 밖의 모든 자들에게 날마다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9절에서 “지식과 총명”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짝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지식과 총명과 더불어 자랍니다. 지식과 총명이 더할 수록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자라가고, 사랑이 자라갈 수록 지식과 총명이 더해갑니다. 지식과 총명은 사랑이라는 물결을 보호하고 그 대상에게까지 풍성하게 흡족하게 다다르게 하는 수로(waterway)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이 영감하시고 조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사는 경험적인 지식에 토대를 둡니다. 지식과 총명이 영글은 결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랑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 지식과 총명에 걸맞는 성격을 띕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영글은 사랑이기에 일방적이지도 무분별하지도 않습니다. 사랑받는 대상의 진정한 필요와 만족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휘되는 사랑하는 주체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주체를 소진시키고 공허하게 하는 비굴한 사랑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 모두를 유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사랑입니다.
빌립보서, Phil 3:10의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라고 하는 바울의 말과도 닿아있는 9절의 ‘지식과 총명’은 지적인 이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지적인 이해는 시작일 뿐 그것을 넘어섭니다. 바울이 9절에서 말하고 있는 ‘지식과 총명’은 개개의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음으로 누리기 시작하는 경험으로서의 지식과 지혜입니다.
이 사랑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신자에게 부어진 이 사랑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말씀을 먹고 자랍니다. 말씀의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믿음으로 화합(순종)할수록 이 사랑은 살아서 역사하고 계속해서 풍성하게 자라갑니다.
말씀의 온전한 성취요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갑니다. 신자들에게 부어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본질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전까지는 쉬지 못합니다. 그를 맏아들로 드러나게 하시는 성자를 향한 성부의 사랑입니다. 신자에게 이 사랑이 부어짐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향한 사랑의 바다에 뛰어들고 그 대양을 함께 헤엄칩니다. 아들을 향한 성부의 사랑에 참여하는 사랑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와 사랑으로의 초대입니다(요한일서, 1 Jn 4:16이하) .
빌립보서 1:6-8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바울의 중심과 그 표현입니다(빌립보서, Phil 1:8).
Philippians 1:8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이니 이런 애정과 표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대면하기 전까지 복음에 대한 뒤틀린 증오로 타오르던 ‘유대교인 사울’의 행적을 기억한다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열망과 그 표현을 예사로 지나칠 수 없습니다(갈라디아서, Gal 1:13-14) .
Galatians 1:13–14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제 바울은 말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로 드러납니다. 이전에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황무한 땅과 같았던 메마르고 찌르는 그의 삶의 정원은 의의 태양 빛을 흠뻑 머금은 온갖 화초들이 만개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그들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갓 태어난 빌립보 교회를 거만한 제국의 적대적 이교문화 한 가운데 남겨두고 떠난 바울이, 그것도 감옥에 갇혀 스스로는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바울이 이리 가운데 있는 양무리와 같은 빌립보 성도들로 인해 불안하고 조마조마해하기는 커녕 이토록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빌립보 성도들의 신앙과 구원이 바울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고, 바울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바울의 목양아래 있던 교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알았습니다. 자신을 통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을 뿐 저들 안에서 구원의 선한 일을 주권적으로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그 뜻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실체요, 그 모양과 성격입니다. 거듭난 하나님 집안 사람들의 본성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는 전인적이고, 총체적이고, 지속적입니다. 무엇보다 복음 중심적입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입니다.
무엇보다 이 교제는 영원한 교제입니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영원전부터 시작된 교제요 영원까지 이르는 교제입니다. 인간 관계의 가장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육신의 가족이 누리는 교제보다도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누려집니다. 무엇보다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육신의 가족과의 교제는 함께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 사람들로 드러나지 않는 한 순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리고 본성적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선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혹은 환경 의존적입니까? 내 감정이나 상황, 혹은 내가 기도하는 대상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계속되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기도 심지가 마르기 일수 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변치않는 언약의 신실하심만이 성도의 기도의 심지를 성전의 등불과 같이 항상 타오르게 하는 기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1:10 (NKRV)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는 다름 아닌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소망과 근거와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둘 때 우리는 바울과 같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받을 때까지, 찾을 때까지, 열릴 때가지 쉬지 않고 기도할 뿐 아니라 끝까지 바랄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기도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기도 역시 소망을 가지고 심지어 기대와 기쁨으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나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보증이 되시며 친히 기도를 명령하시는 이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지시 않습니까!